“축구에 대한 애정은 그대로지만, 그라운드를 떠날 용기가 생겼다.”
험난했지만 뜻깊은 여정이었다. 여자축구 선수 정은욱이 해외 생활을 마무리하면서 선수 생활의 마침표를 찍는다. WK리그 수원도시공사(현 수원FC위민) 출신 정은욱은 지난해 2월 뉴질랜드 리그 엘러슬리 AFC로 이적하며 처음으로 해외 무대에 발을 내디뎠다. 이후 몽골리그 코브드 웨스턴 FC, 세르비아 리그 FK 스파르타크 등에서 뛰었다. 폭넓은 경험을 쌓은 그는 지난달 귀국,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
은퇴라는 마침표,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정은욱은 “다른 인생을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은 전부터 있었다. 사실 해외에 나가서 좀 힘들었다. 해보지 못한 경험들을 하면서 울기도 하고, 내가 해온 축구를 부정 받는 느낌도 들었다. 문제는 스스로 결과에 대한 집착이 커졌다는 점이다. 평가받는 게 당연한 직업이지만 결과를 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히면서 축구가 잘 풀리지 않았고 행복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설명했다.
미련은 없다. 축구를 덜 사랑했던 것도 아니다. 정은욱은 대덕대를 졸업하고 WK리그를 뛰었으나, 제대로 축구를 배우고 싶다는 생각에 대학(대경대)으로 돌아가기도 했다. 또 성인이 돼서도 술이나 커피, 담배 등 선수로서 몸에 도움되지 않을 행동들은 일절 하지 않았다. 오로지 포커스를 축구에만 맞춘 삶을 살았다.
그는 “많이 후련하다. 나는 하고 싶은 걸 다 이룬 선수다. 해외에서도 뛰어봤고, 좋은 팀에서 축구를 하며 월급도 받아봤다”며 “사실 경기에서 배제되면 기분이 나쁘고 자존심도 상해야 하는 게 맞지 않나. 근데 어느 순간 내가 그라운드 밖에서 축구를 봐도 재밌게 느껴지더라. 내가 축구를 사랑하는 마음은 그대로지만, 이 그라운드를 떠날 용기는 생겼구나 싶었다”고 전했다.
해외 경험은 축구선수 정은욱뿐만 아니라, 사람 정은욱에게도 자양분이 되는 시간이었다. 정은욱은 “지금의 긍정적인 생각,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던 건 내가 나가서 경험해봤기 때문이다. 덕분에 시야가 넓어졌다”며 “한국은 축구선수라면 축구만 해야 한다. 틀렸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 해외에서 느낀 점은 선수들에게 축구는 인생의 한 부분이기도 하더라. 그렇게 하니까 축구를 더 잘하는 것 같기도 했다”고 돌아봤다.
이어 “엄청 좋은 팀이 아니더라도, 해외에 나갈 기회가 있다면 다른 선수들도 도전해봤으면 한다. 꼭 나가야 한다는 건 아니지만, 어느 방향이든 스스로도 몰랐던 면들을 발견할 수 있다. 축구든 인생이든 발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축구선수로 살아온 여정, 그 뒤엔 부모님의 노고가 숨어있다. 정은욱은 “엄마가 정말 많이 노력하셨다. 학생 때 열악한 창단 팀에 뛰었다. 엄마가 와서 선수단 밥도 해주고 청소도 해주고 매니저 역할을 하셨다. 먼 거리를 가야 하면 차량 지원도 해주셨다”며 “이후 치열한 경쟁이 있는 팀으로 갔다. 나는 뛰어난 선수가 아니라 눈에 띄기 어려웠다. 엄마는 혹시라도 지원에서 부족한 부분이 있을까 걱정하셨던 것 같다. 바쁜 와중에도 경기도 매번 보러 오고 없는 돈으로 레슨 시켜주고, 딸이 먹고 싶을까 선수단에게 제철음식이나 과일 등을 보내기도 했다”고 돌아봤다.
이어 “사실 당시엔 너무 싫었다. 엄마가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었는데, 나이가 들고 나니 그런 걸 받아들이게 되더라. 이런 생각이 드는 것도 때가 타는 것 같아서 마냥 좋지는 않았다”면서 “더 크니 미안함과 감사함만 남더라. 부모님 덕분에 내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그럼에도 ‘엄마가 이렇게까지 안 해도 되는데’라는 생각은 여전하다”고 강조했다.
이젠 긍정적인 요소들만 마음에 품고 새출발에 나선다. 20대 초반에 누리지 못했던 것들, 또 접하지 못했던 것들 모두 경험하면서 자신의 세계를 넓혀가겠다는 각오다. 물론 이 사이에서도 축구는 빠지지 않는다. 정은욱은 고향 진주로 돌아가 ‘EZFC 진주’ 여자풋살팀을 창단했다. 마케팅부터 코칭까지 스스로 척척 해나가고 있다.
정은욱은 “나는 고향 진주를 좋아한다. 다만 내가 어렸을 때는 질 좋은 레슨을 받기 위해서 대구 등 큰 도시로 최소 2시간가량을 이동하곤 했다. 운동하고 집에 오고 싶은데, 머니까 그것도 쉽지 않았다”면서 “이젠 내가 그 역할을 하고 싶다. 내가 가장 잘하는 것도, 좋아하는 것도 축구다. 내가 진주에서 수업을 한다면 이 주위에 사는 사람들이 더 편하게 축구를 배우러 올 수 있지 않겠나”라고 설명했다.
이어 “최종적으로는 여자축구, 여성이나 유소년을 위한 센터를 차리고 싶다. 부족한 부분은 있겠지만, 계속 공부해서 채워나가면 좋은 퀄리티의 교육을 해드릴 수 있을 것 같다”며 “엄마가 최근에 ‘단정 짓지 말고 많이 열어두라’는 말씀을 하셨다. 축구도, 교육도, 어떤 부분이든 계속 확장시키면서 시너지를 낼 수 있도록 내 세상을 넓혀가겠다”고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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