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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괴로움 잊으려 독한 술?… 토닥이듯 위로하는 사케의 매력

입력 : 2026-10-23 06:00:00 수정 : 2026-10-23 04: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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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년 전통 일본 ‘키우치 주조’ 시음회
토시유키 키우치 키우치주조 대표가 시음회 행사장에서 키쿠사카리 준마이슈 사케를 들고 있다. 박재림 기자
토시유키 키우치 키우치주조 대표가 시음회 행사장에서 키쿠사카리 준마이슈 사케를 들고 있다. 박재림 기자

 

“일본에서도 사케는 괴로울 때 무언가를 잊으려 마시는 술은 아니죠. 달고 부드러우니까요.”

 

203년째 사케를 빚는 일본 ‘키우치 주조’의 토시유키 키우치 대표가 최근 한국을 찾아 국내 기자와 사케·위스키 인플루언서를 만났다. 지난 21일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의 씨에스알(CSR)테이블에서 열린 키우치 시음회를 통해서였다. 토시유키는 오너로서 주조의 역사와 제품에 대한 설명 외에도 사케 메이커로서 사케 특유의 맛과 향, 질감, 어울리는 술자리의 성격 등을 공유했다.

 

◆“사케 203년, 단 한 번도 알코올 섞지 않았다”… 고집스런 장인정신

 

키우치 주조는 1823년 문을 열었다. 이바라키현 나카시 코노스 마을에 터를 둔 키우치 가문은 당시 에도막부에 보낼 연공미를 거두고 보관하는 집안이었는데 남은 쌀로 사케를 양조한 것이 시작이었다. 그 뒤 170년 이상을 사케에 집중하다 1996년 맥주, 2016년 위스키로 주종을 확대했다.

 

한국에선 이른바 ‘부엉이 맥주’로 통하는 히타치노네스트 맥주가 유명하지만 아무래도 200년이 넘는 전통의 사케에 눈이 간다. 창업 가문의 8대손이기도 한 토시유키 대표 역시 가장 집중하는 분야는 사케라고 강조했다.

 

키우치 주조의 사케 브랜드명인 ‘키쿠사카리’는 우리말로 ‘번성한 국화’를 뜻한다. 100% 지역 쌀과 직접 만든 누룩을 독자 노하우로 발효한다. 2차세계대전 이후 일본인의 음주량이 급증하면서 대부분 사케 주조들이 대량 생산에 용이하도록 생산 방식을 바꾼 것과 달리 키우치는 가문의 전통을 유지했다.

 

203년 전통의 키우치 주조. 키우치 주조 홈페이지 갈무리
203년 전통의 키우치 주조. 키우치 주조 홈페이지 갈무리

 

또한 키우치는 203년 동안 사케에 양조 알코올을 섞은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전통 사케는 순수 쌀로 만든 술이라는 의미의 ‘준마이(순미주)’인데 일본에 쌀이 부족하던 시기 준마이에 양조 알코올을 섞은 ‘혼조조’, ‘긴조’, ‘다이긴조’가 생겼다. 하지만 키우치는 새로운 술의 양조를 거부한 것. 이후 준마이에 과실향 등을 더한 준마이긴조·준마이다이긴조가 추가되긴 했지만 여전히 양조 알코올을 섞은 사케는 만들지 않는다.

 

토시유키 대표는 “사케의 역사는 1500년에 이른다. 그동안 다른 주조는 상황에 따라 생산 방식에 변화에 줬지만 우리는 선조의 방식을 지키고 있다”며 코다와리(こだわり)를 언급했다. 이는 ‘고집스런 장인정신’을 의미한다고.

 

◆부드럽게 목을 넘어오는 달달함… “생긴 건 소주인데 하나도 쓰지 않네”

 

자부심이 전해지는 키우치의 사케, 키쿠사카리 중 4종을 시음했다. 제일 먼저 나온 ‘하루이치린’은 ‘봄의 한 송이 꽃’이라는 제품명처럼 꽃향기가 코를 즐겁게 했다. 맛도 달았고 탄산이 살짝 느껴졌다. 키우치 측은 “병 안에서 일어나는 2차 발효로 자연스러운 탄산감을 느낄 수 있다”며 “약간 뽀얗게 보이는 것도 효모가 일하고 있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식전주로 입맛을 돋우는 샴페인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다음은 ‘준마이슈’로, 쌀 본연의 맛을 그대로 담은 순수 발효주라는 설명대로 은은한 단맛과 감칠맛, 깔끔하고 부드러운 목넘김이 기억에 남았다.

 

세 번째는 ‘준마이 타루자케’였다. 준마이슈를 일반적인 스테인리스통이 아닌 삼나무통에서 숙성을 했다는 설명을 들어서인지 확실히 나무의 껍질향 같은 것이 느껴졌고 앞의 두 술과 비교해 쌀의 향도 덜했다. 맛도 쌉싸름했는데 한국 소주와 조금 비슷했다.

 

마지막 사케로 맛 본 ‘야마하이 겐슈’는 산미가 느껴졌다. 1년 이상 숙성한 자연유래 유산균으로 빚는 야마하이에 물을 더하지 않은 원주인 겐슈가 조화를 이룬 사케라고. 토시유키 대표가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한다고 꼽은 사케이기도 했다.

 

키우치 주조의 키쿠사카리 사케가 CSR테이블 진열장에 진열돼 있다. 박재림 기자
키우치 주조의 키쿠사카리 사케가 CSR테이블 진열장에 진열돼 있다. 박재림 기자 

 

사케 4종의 전체적인 느낌은 ‘소주처럼 생겨서 전혀 소주 같지 않네’였다. 개인적으로 소주를 꽤 즐기지만 그럼에도 첫 잔만큼은 백에 아흔아홉은 표정을 찡그리며 마시게 되는데, 사케는 향도 목넘김도 부드러웠다. 집에서 ‘혼술’할 때 소주를 마시는 건 손에 꼽는데 사케는 충분히 자주 마실 수 있을 것 같았다.

 

또 같은 의미에서 소주는 안주 없이 마시는, 소위 ‘깡소주’가 엄두가 나지 않는데, 사케는 홀짝 홀짝 마셔도 안주가 필요한 느낌은 없었다. 개인차가 있을 수 있어 토시유키 대표에게 질문했더니 “사케는 산도가 낮을수록 단맛이 강한데 아무래도 단맛과 향이 강할수록 안주는 추천하지 않는다”며 “산도가 30% 이상이면 안주와 어우러질 것”이라고 답변했다.

 

이어 그는 “시원하게 마셔야 하는 하루이치린을 제외하고 나머지 사케는 상온 혹은 약 40도로 데워서 마시는 것도 좋다”며 “앞으로 한국에서 사케의 인기가 더 높아질 거라 본다. 한국음식은 일본음식과 비슷하면서 또 매운데 사케의 단맛이 매운 맛을 중화하기 때문”이라고 웃었다.

 

토시유키 대표가 키우치 주조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박재림 기자
토시유키 대표가 키우치 주조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박재림 기자

 

개인적으로 바이브의 노래 ‘술이야’가 대히트를 했고 임창정의 ‘소주한잔’이 여전히 인기곡이던 2006년에 대학생활을 시작했다. 그 영향인지 실연 등 힘든 일을 겪을 때면 소주잔을 부딪치며 “한 잔 마시고 싹 잊어” 같은 얘기를 많이 듣기도 했고 건네기도 했다. 쓰고 독한 술을 털어 넣으며 인생의 쓰디쓴 순간을 망각하자는 의미였을 테다.

 

그 시절 사케를 알았다면 어땠을까. 동성의 친구나 선배형이 건넨 소주에 담긴 다소 투박한 위로와는 결이 다른, 이성 친구나 선배누나가 전한 사케의 위안은 따듯하게 어깨를 토닥이는 그것이 아니었을지.

 

◆맥주·위스키 사업 확장… 전통 지키며 새 시대 흐름에도 발맞춰

 

앞서 키우치는 세기말을 앞두고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크래프트맥주(수제맥주) 사업이었다. 1996년 일본 주세법의 완화로 소규모 양조장도 크래프트맥주를 생산할 수 있게 됐다. 그때 전국에서 약 400개 주조가 크래프트맥주 사업에 뛰어들었는데 키우치도 그 중 한 곳이었다.

 

토시유키 대표는 “사케는 섭씨 20도에서 발효하기 때문에 여름에는 만들 수 없고 겨울에 양조가 가능하다”며 “여름에도 할 수 있는 걸 찾다가 맥주 사업을 시작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부엉이 맥주’로 유명한 히타치노네스트 맥주가 CSR테이블 진열장에 진열돼 있다. 박재림 기자
‘부엉이 맥주’로 유명한 히타치노네스트 맥주가 CSR테이블 진열장에 진열돼 있다. 박재림 기자

 

그렇게 탄생한 것이 히타치노네스트 맥주로, 출시 이듬해인 1997년 국제맥주대회에서 금상(1위)을 차지했다. 그 뒤로도 국내외 맥주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현재 생산량의 절반이 40개국 이상으로 수출 중이다. 한국에서도 부엉이 맥주라 불리며 인기를 끌고 있는데 최근에는 K-팝스타 지드래곤과 협업한 컬래버레이션 제품이 나오기도 했다.

 

키우치 주조의 예비 오너로서 현 대표인 부친과 함께 방한, 이번 행사를 함께한 메구미 키우치 제네럴 매니저는 유창한 한국말로 “K-팝 팬이라 지드래곤과 협업 기회가 왔을 때 정말 기뻤다”며 “아버지는 K-팝에 관심이 없는 분이라 시큰둥해서 적극적으로 설득했다”고 웃어보였다.

 

한국을 비롯한 전 세계에서 히타치노네스트의 아이콘이 된 부엉이 캐릭터는 사실 맥주가 처음 탄생했을 땐 존재하지 않았다. 당시 맥주의 캔과 병에 붙은 것은 황새였다. 황새는 아시아권에서는 이미지가 나쁘지 않지만, 서구권에서는 아기를 물어가는 새라고 해서 이미지가 부정적이다. 전 세계로 진출을 노린 키우치는 황새를 빼고 동서양에서 부귀영화를 상징하는 부엉이로 그 자리를 채웠고 히타치노네스트의 대성공으로 이어졌다.

 

21세기에 접어들어선 위스키로도 사업을 확장했다. 개인적으로 스카치위스키를 좋아해서 신혼여행도 스코틀랜드로 다녀왔다는 토시유키 대표는 2016년부터 수입몰트로 위스키를 시험 제조했다. 히타치노네스트 맥주를 만들기 위해 대량으로 들인 오크통을 좀 더 효율적으로 쓴다는 의도도 있었다.

 

이어 2020년 야사토 증류소, 2023년 양조용 몰트공장이 차례로 완공됐고 창사 200주년을 기념하는 싱글몰트 위스키 ‘히노마루 시그니처1823’을 출시했다. 이 위스키도 이날 시음할 수 있었는데 초콜릿과 캐러멜 향과 더불어 스모키한 견과류 맛이 느껴졌다.

 

키우치 주조의 히노마루 위스키가 CSR테이블 진열장에 진열돼 있다. 박재림 기자
키우치 주조의 히노마루 위스키가 CSR테이블 진열장에 진열돼 있다. 박재림 기자 

 

토시유키 대표에 따르면 최근 일본 내 사케 주문량은 약 60% 감소했다. 특히 젊은 층에서 사케를 찾지 않는 분위기라고. 그래도 2010년대 후반부터 위스키의 붐이 일었다. 결과적으로 키우치는 전통을 지키면서도 달라지는 세상과도 발을 맞춰가고 있는 것이다.

 

토시유키 대표는 키우치의 지역성도 강조했다. 그는 “키우치 주조는 지역의 곡물을 사용하고 오크통 역시 로컬 제품을 쓴다. 주조 주변의 농부 약 1000명과 협업 중”이라고 말했다. 맥주의 브랜드명에 들어간 히타치노 역시 지역의 옛 지명이다.

 

한편 이날 행사는 키우치 대표 제품의 국내 수입·유통사인 씨에스알(CSR)와인에서 주최 및 진행했다. 담당자들은 참가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소주, 와인 등과 비교 자료를 제공하고 시음 주류와 어울릴 만한 음식도 추천했다.

 

심영보 CSR 코리아크래프트브류어리 대표 CEO는 “키우치가 한국에서는 히타치노네스트 맥주로 유명하지만 일본에서는 사케, 맥주, 위스키, 와인, 매실주 등 모든 주종이 퀄리티가 높은 것으로 평가 받는다”며 “도쿄 등 주요 번화가에 있는 히타치노 브루잉펍도 인기”라고 소개했다.

 

박재림 기자 jamie@sportsworldi.com



박재림 기자 jamie@sportsworld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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