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박해수에게 ‘허수아비’는 높은 성적 이상의 의미를 남겼다. 연기 고민이 깊어지던 시기, 운명처럼 찾아온 강태주를 통해 배우로서 한 단계 더 나아갈 수 있게 한 작품이다.
지난달 26일 종영한 ENA 드라마 ‘허수아비’는 연쇄살인사건의 진범을 수사하던 형사가 자신이 혐오하던 놈과 뜻밖의 공조 관계를 맺으면서 펼쳐지는 범죄 수사 스릴러물. 실화인 이춘재 연쇄살인 사건을 다뤘다. 연쇄살인이라는 무거운 소재를 다룸에도 불구하며 놀라운 시청률 상승세를 거두며 최고 8.1%로 유종의 미를 거뒀다. 작품의 중반부 범인이 밝혀졌지만, 긴장감을 이어가며 시청률을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는 점도 의미있다.
박해수는 “많은 사랑을 피부로 느끼고 있다”라고 말하며 웃었다. 호불호가 있을 거라 짐작하면서도 막연한 기대는 있었다. 그는 “범인이 누구냐고 엄청 물어보시더라. 아내에게만 이야기하고 친누나와 부모님께도 말하지 않았다”며 “상상 못 할 만큼 큰 사랑을 받을 수 있어 감사하다”고 종영 소감을 밝혔다.
◆‘허수아비’로 맞은 전환점
연기하는 내내 한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이 강태주를 향해 몰아쳤다. 고통을 견디면서도 누군가를 고통스럽게 해야하는 두려운 감정을 느껴야 해쏙, 이를 연기해야 하는 박해수는 강태주의 감정을 고스란히 떠안아야 했다.
대본 리딩 후에도 가시지 않던 두려움은 현장에서 눈 녹듯 사라졌다. 차시영 역의 이희준, 서지원 역의 곽선영, 이기환(이용우) 역의 정문성이 함께 짐을 짊어졌다. 캐릭터로 표현하지 않고 인간적으로 접근하고자 했다. 특히 “척 하지 말자”던 이희준의 조언은 큰 힘이 됐다. 그렇게 강태주는 박해수의 연기 인생에 큰 전환점을 만들었다.
박해수는 “이런 인물의 삶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많이 부끄러웠다”고 했다. 배우로서도 큰 도전이었다. 강태주는 장르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완성형 형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건이 벌어지면 멋지게 해결하기보단 현실적인 한계에 부딪히는 불완전한 인간이었고, 친구와 가족을 지키기 위해 외로움을 숙제처럼 택했다. 통쾌함보단 답답함을 주는 강태주의 감정선에 시청자의 볼 멘 소리도 나왔다.
그는 이런 강태주를 바라보며 “좌초되는 순간에 스스로 붙잡을 수 있을까, 고통을 마주하고 진짜 아파할 수 있을까 고민도 됐다”면서 “어른이 된 태주를 잘 표현할 수 있을지도 걱정했지만, 동시에 이상향 같은 어른을 표현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고 말했다.
◆형사에서 프로파일러로…강태주의 30년
한때 강력계 형사였고, 나이가 들어 대학에서 범죄학을 가르치는 프로파일러가 됐다. 집요한 관찰력과 직감으로 사건의 본질을 파고드는 인물이지만, 30년 전 강성연쇄살인사건에서 진실을 끝까지 지켜내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평생 짊어지고 살아온 인물이다. 그리고 30년 뒤, 진범 이용우의 등장으로 다시 사건과 마주하게 된 태주는 왜곡된 과거를 바로잡기 위해 마지막 싸움을 시작한다. 더 이상 누군가의 손에 흔들리는 ‘허수아비’로 남지 않기 위해서다.
박해수는 “마음 안에는 진실을 추구하는 옹달샘이 존재하는데 당시의 능력으로는 불가항력적인 것들이 있었을 것 같다”고 캐릭터를 해석했다. 젊은 강태주의 능력의 한계였을지도, 사회적 압박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안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
범인의 등장은 시청자에게도, 박해수에게도 충격 그 자체였다. 교도소에서 이용우와 마주한 강태주의 촬영 장면은 후반부에 촬영했다. 박해수는 “화면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범인이 공개되기 전에도 이용우를 바라보면서 연기했다”면서 “정문성 배우의 얼굴을 나만 본 게 아쉽다. 섬뜩함에 소름이 끼쳤다”고 돌아봤다.
동네 친구였던 두 사람이 살인자와 프로파일러로 만났다. 온전히 배우들의 연기력으로 완성된 장면이다. 그는 “현장에 있었다면 강태주가 왜 그렇게 선을 그었는지 설명된다. 너무나 자극적이고 깊은 감정으로 그 신을 촬영했다”며 “직접 그 자리에 있었지만 방송을 보며 다시 한 번 놀랐다”고 말했다. 시청자의 뒤통수를 때리듯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범인을 공개했기 때문이다. “(정)문성이 형이 정말 고생을 많이 했다”는 그는 “서점에서 마지막으로 ‘다시는 보지말자’고 말하던 신에서 감정이 카메라에서도 나오더라. 두려움이 섞인 중의적 의미였을 거다. 보면서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극찬했다.
◆흔들린 강태주, 성장한 박해수
2007년 연극으로 데뷔해 드라마 ‘슬기로운 감빵생활’로 대중의 눈에 들었다. 넷플릭스 ‘오징어게임’을 시작으로 ‘종이의 집 : 공동경제구역’ 시리즈, ‘수리남’, ‘악연’, ‘자백의 대가’ 등 글로벌 OTT 주연작도 여럿이다.
베테랑인 그에게도 유독 여운이 남는 작품이다. “작품이 끝나면 속시원하다는 생각이 든다. 잘 지내왔는데, 어느날부터 문득 다시 그 감정 안으로 들어와 있더라”라고 고백하며 “아련하고 먹먹하게 남아 있다. 오랜만에 좋은 인물을 만났다는 느낌이 들어 아쉬운 마음도 크다”라고 애정을 보였다.
연기 고민이 크던 시기에 찾아온 ‘허수아비’다. 인물의 인간적인 면모를 들여다보지 못한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던 때였다. 그는 “드라마의 기능적인 요소로 존재하는 건 잘 할 수 있는데, 인간적인 면이 튀어나오게 만들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살아있는 인물을 만들어내고 싶었지만 정답을 찾지 못했다.
하지만 이번 작품은 달랐다. 강태주가 흔들리면 흔들리는 대로 내버려뒀다. “완성되지 않은 인물이라도 허세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라. 애쓰려는 의지를 가지고 작품 안에서 움직이니 시청자분들도 알아봐 주신 것 같다”고 의미를 찾았다. 그는 “강태주를 만나 박해수도 큰 위로를 받았다”고 진심을 전하며 “많은 사랑에 감사하다. 배우는 잊혀지더라도 작품은 오래 기억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정가영 기자 jgy9322@sportsworld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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