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사고 뒤에 숨어 살고 싶지 않았어요.”
한동안 멈춰 있던 시간을 움직이게 한 건 결국 그토록 사랑했던 야구였다. 박명헌(27·고양PIC)은 지난 1일 경기 고양 국가대표 야구훈련장에서 열린 2027 KBO 신인드래프트 트라이아웃에 참가했다. 오랜 공백을 지나 10개 구단 앞에 서기까지 꼬박 6년이 걸렸다. 그는 “준비한 만큼은 보여준 것 같아 만족한다”며 후련하게 웃었다.
전주고를 졸업한 박명헌은 2018 KBO 신인드래프트서 지명받지 못해 원광대로 향했다. 다시 기회를 준비하던 중 2020년 삶의 방향을 송두리째 바꾼 사고가 찾아왔다. 방위산업체에서 근무하다 기계에 오른손 검지가 끌려 들어가 절단됐다. 접합 수술을 받았지만 의사로부터 영구적인 후유장애가 남아 야구를 계속하기 어려울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
더구나 공을 던지는 오른손의 검지였다. 다시 선수로 돌아갈 수 있을지조차 장담하기 어려운 상황, 박명헌도 그때는 야구 인생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사고 뒤에는 긴 방황의 시간이 이어졌다. 몸을 추스르는 것부터 쉽지 않았다. 첫 1년은 치료에, 또 1년은 손가락을 다시 굽히고 펴기 위한 재활에 매달렸다. 그는 “그때는 야구가 문제가 아니었다. 이 손으로 앞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지조차 막막했다”고 떠올렸다.
좌절이 거듭되는 가운데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기까지 겹치면서 일상마저 무너졌다. 그는 “그때는 몰랐는데 돌아보면 우울증 초기 증상과 비슷했던 것 같다”며 혼자 살던 집에 쌓인 쓰레기봉투조차 제대로 치우지 못했던 시절을 떠올렸다. 그렇게 좋아했던 야구와도 3년 가까이 멀어졌다.
무너진 마음을 다시 세우는 데도 시간이 필요했다. 서점을 찾아 책을 읽었고, 고등학교 3학년 때 멈췄던 일기도 다시 쓰기 시작했다. 하루하루 생각을 글로 옮기면서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러자 애써 외면했던 야구도 다시 마음 한편에서 커지기 시작했다. 20대 후반으로 접어들면서는 ‘이대로 끝내도 괜찮을까’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자꾸 던졌다. 박명헌은 “내가 정말 못하는 선수였는지, 끝까지 갔어도 재능이 없었던 선수인지 확인하고 싶었다”며 “손가락 사고를 당했다는 이유로 평생 그 뒤에 숨어서 살고 싶지 않았다”고 말했다.
다시 해보겠다는 마음이 섰다고 곧장 선수로 돌아갈 수 있는 몸이 된 것은 아니었다. 어렵게 야구공을 다시 잡았지만 1루까지 제대로 송구하지 못할 만큼 악력이 떨어져 있었고 신경통도 심했다. 서두르지 않고 2년짜리 계획부터 짰다.
한때 100㎏까지 불었던 체중을 80㎏대로 낮춘 뒤 다시 근육을 붙였다. 웨이트와 파워 트레이닝을 직접 공부하며 3대 운동 합계 500㎏을 달성했고, 배트 스피드를 끌어올리는 데도 공을 들였다. 하루하루 몸이 달라지는 것을 확인하면서 비로소 ‘다시 선수로 설 수 있겠다’는 확신도 생겼다.
익숙해진 직장인의 삶도 내려놨다. 익산에서 약 3년간 물류업체에 다니며 직장생활을 이어왔지만, 올해 초 회사를 그만두고 대구로 옮겨 야구에 온전히 매달렸다.
조금이라도 자신을 알릴 방법을 찾다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훈련 과정과 타격 영상을 꾸준히 올렸고, 이를 눈여겨본 독립야구단 고양PIC에서 먼저 연락이 왔다. 어렵게 얻은 실전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경기 날이면 새벽 5시에 대구를 출발해 경기도를 오갔다. 6경기에 출전, 홈런 2개를 때려내는 등 꿈을 향해 다시 뛰기 시작했다.
주변에서 모두 쉽게 고개를 끄덕인 선택은 아니었다. 오랫동안 뒷바라지한 가족도, 친구들도 이제는 현실을 생각할 때가 아니냐고 물었다. 박명헌 역시 안정적인 직장생활을 내려놓는 일이 두렵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하지 않고 남길 후회가 더 컸다. “이 도전을 하지 않으면 정말 후회하면서 살 것 같았다. 야구를 너무 좋아했다”고 운을 뗀 그는 “몇 년을 멈춰 있었다고 해서 제 20대까지 끝난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다시 움직일 수 있다는 걸 스스로 증명하고 싶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한때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흘려보냈다고 여겼던 시간은 이제 다시 목표를 향해 움직이는 시간으로 바뀌었다. 오는 21일 신인드래프트의 결과는 누구도 알 수 없다. 박명헌이 이번 도전에서 확인하고 싶은 건 결과만이 아니다. 저마다 출발선도, 처한 사정도 다르지만 그것을 이유로 스스로 멈추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남기고자 한다.
그는 “사람마다 집안 배경도 다르고 처한 환경도 다를 수 있다. 각자 사정이 있겠지만, 그런 것에 굴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는 걸 나 자신에게 증명하고 싶다”며 “나중에 돌아봤을 때 ‘이런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발버둥쳤구나. 정말 열심히 살았구나’라고 스스로 자랑스러워할 수 있는 20대를 보내고 싶다”고 힘줘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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