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철했던 천재 해커도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는 별수 없이 허당이 됐다. 팀의 브레인 역할을 톡톡히 해내던 캐릭터가 사랑 앞에서만큼은 삐걱대며 시청자들의 애를 태웠다. 감질나는 로맨스를 뒤로하고, 이제는 찐로맨스를 꿈꾸는 배우 무진성을 만나봤다.
무진성은 지난 12일 종영한 MBC 금토드라마 ‘유부녀 킬러’에서 두루미전자 영업3팀 대리이자 천재 해커 기영도 역을 맡았다. 높은 시청률을 유지하며 종영한 덕에 알아보는 이들도 많아졌다. 사인 요청도 늘었고, 방영 중 마주친 시청자들은 세아(이은샘)와의 관계의 결말을 묻기도 했다. 인터뷰로 만난 무진성은 “오래 촬영하다 보니 정이 많이 들었다. 오랜만에 로맨스를 보여드릴 수 있어 기분 좋았고,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는 걸 느끼게 된 작품이었다”라고 종영 소감을 전했다.
◆천재 해커와 모태솔로의 사이에서
기영도는 킹피셔 유보나(공효진)의 작전을 지원하며 사건 해결에 힘을 보태는 핵심 인물로 뛰어난 해킹 실력과 빠른 판단력을 바탕으로 각종 정보를 찾아내며 팀의 든든한 브레인으로 활약했다. 원작에서는 ‘잘생김’을 담당하는 캐릭터였다. 시크한 콘셉트의 냉미남 설정에 출연이 확정되자마자 피부과와 헬스장을 오갔다. 한 시간이면 끝날 헤어 스타일링도 두 시간을 넘길 정도였다. 트렌디한 직장인의 느낌을 주기 위해 의상 핏까지 신경 썼다.
수많은 작품을 지나왔지만 기계를 다루는 역할은 처음이었다. 그러나 상상 속 장면들은 현실과 달랐다. 실제 촬영장에서는 CG를 입히기 전, 검정 화면을 마주한 채 연기해야 했다. 모니터 앞에서 무려 26신을 몰아서 촬영한 날도 있었다. 그는 “세트는 협소했고, 공효진 선배님의 대사를 상상하며 표현해야 하는 점이 어려웠다”며 “타이밍을 상의하고 촬영하느라 모든 스태프가 고생했던 기억이 많이 남았다”고 돌이켰다.
초반 실력파 해커의 집중력에 초점이 맞춰졌다면 중후반부에서는 풋풋한 로맨스 감성으로 ‘유부녀 킬러’의 분위기를 환기했다. 다만 천재 해커도 사랑 앞에선 허당이었다. 선배 유보나를 향한 마음이 혼란스럽게 그려졌으나, 권세아를 만나면서 조금씩 사랑을 깨달아갔다.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질투하고,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마주하며 조금씩 변해갔다. 인간 기영도의 입체적인 변화는 ‘유부녀 킬러’의 흥미로운 관전포인트였다.
각기 다른 태도로 상대역을 대했다. 만나는 사람마다 확연히 달라지는 기영도의 얼굴을 보는 재미도 쏠쏠했다. 먼저 현남(하율리)과는 티격태격한 친구 간의 신경전을 표현하려 했다면, 세아 앞에서는 완벽남의 매력적인 허점을 노출했다. 유보나에겐 진득하고 진중한 후배로 보이길 바랐다. 성훈(최우성)에 대해 묻자 “성훈은 안중에도 없었다. 세아에만 집중하다 보면 성훈과의 관계는 자연스럽게 나올 거라 생각해 크게 생각하지 않고 연기했다”고 단호하게 답해 웃음을 안겼다.
세아를 만나기 전 유보나를 향한 기영도의 모호한 스탠스가 시청자를 헷갈리게 했다. 원작에서도 미묘한 줄타기가 있었다. 이에 관해 무진성은 “존경하는 선배에 맞춰 연기했다. 처음 유보나 선배에 대한 감정은 강한 여자에게 끌리는 영도의 캐릭터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어 “처음엔 끌림으로 시작했지만, 함께 일하며 멋진 선배를 향한 존경심이 커졌을 거다. 집들이에 갔을 때도 질투가 아니라 우상이 희생하는 모습에 삐딱한 마음이 나왔다고 생각한다. 그게 세아한테도 번진 게 아닐까”라고 해석했다.
무진성은 “(실제로) 모태솔로가 아닌 내가 그런 척을 하면 부담스럽게 느껴질 것 같았다”며 “대신 내가 해보지 않은 서툰 일을 했을 때의 반응을 고민했다. 처음 하는 운동, 처음 하는 업무를 대할 때 삐걱 대는 모습을 나답게, 그대로 옮기려고 했다”고 노력을 전했다.
세아를 향한 “사랑한다”는 고백도 화제가 됐다. 대사를 보자마자 ‘모쏠이구나’ 싶었다는 그는 “드라마적 장치라는 생각에 최대한 납득할 수 있게 표현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설득력을 갖기 위해서는 빌드업이 필요했다. 빈틈있는 허당의 모습을 중간중간 끼워 넣으며 뜬금없는 사랑 고백도 고개가 끄덕여질 인물을 만들었다.
부담은 있었다. 한쪽에선 킹피셔의 실체를 둘러싼 갈등이 고조되고 있을 때, 한쪽에서 벌어진 청춘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맡은 역할에 최선을 다했다. 무진성은 “항상 내가 맡은 인물보다는 작품에서 이 인물에게 필요로하는 점을 먼저 고려한다. 무거워진 분위기에서 역할이 무너지지 않게“ 하기 위해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허당기를 부각시켰다. 걱정보다 유쾌하게 봐 주셔서 감사했다”라고 답했다.
◆로맨스 바라기 무진성…“타이틀롤 맡고파”
영화 ‘장르만 로맨스’에서 풋풋한 청춘의 모습을 보여줬던 그는 드라마 ‘태풍상사’에서는 강렬한 빌런으로 분했다. 지난달 공개된 넷플릭스 ‘들쥐’에서는 제문재(류준열)를 궁지에 몰아넣는 회계사 손수현 역을 맡아 소용돌이를 몰고 왔다. 어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매력적인 캐릭터로 필모그래피를 쌓아가고 있다. 강한 이미지로 소비되고 있어 걱정도 되지만 그는 “아직 보여드릴 게 많이 남아있다. 매 작품 인물의 방향성에 따라 최대한 다르게 표현하고 싶다”고 힘주어 말했다.
미처 이뤄지지 못했지만, 작품 속 로맨스의 한 축을 담당했다는 점이 꽤 만족스럽다. “이제 정말 제대로 된 로맨스를 하고 싶다”는 그의 말에는 진심이 느껴졌다. 2018년 ‘내추럴 로맨스’를 통해 로맨스 장르를 처음 맛봤다. “나와 정반대되는 인물이었는데, 많은 분이 좋아해 주셨다”고 돌아보며 “그 뒤로는 로맨스 장르를 해보지 않았다. 남자로서 조금 더 성숙해진 지금 남녀의 사랑 이야기를 다룬다면 더 진”자신감을 보였다.
오매불망 로맨스를 꿈꾸는 탓일까. 그는 ‘유부녀 킬러’의 새드엔딩을 상상했다. 만일 아내가 킹피셔인 태성(정준원)의 상황이 된다면, 어떤 선택을 할 것이냐는 물음에 무진성은 “태성은 보나의 손을 잡고 도망쳤지만, 나였다면 내가 킹피셔를 자처해 그녀를 지켜주고 싶다. 슬픈 로맨스를 꿈꿨다”고 반전 엔딩을 그렸다. 워커홀릭 기영도의 미래엔 양예솔 대리(김가희)랑 이어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여지도 열어뒀다. “초반에 발차기하는 장면이 있다. 강한 여자에게 끌리는 영도의 설정상 가능하지 않을까”라고 가능성을 열었다.
어릴 적 꿈은 법조인이었다. 초등학교 때 전교어린이회장, 중학교 때 전교 부회장을 역임하며 리더의 기질이 다분했다. 회의하고 토론하는 과정에 익숙해지다 보니 막연하게 대화를 통해 일을 해결할 수 있는 검사, 변호사를 꿈꿨다. 그러던 어느 날 연극영화과에 지원하겠다는 친구를 따라 보게 된 연극이 인생을 바꿨다. 커튼콜(극이 끝나고 출연자가 무대에 나타나 관객에게 인사하는 것)을 보고 배우라는 직업에 매료됐다. 세상 어떤 직업이 일을 끝내고 이렇게 박수받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연기를 배우기 시작했다.
‘장르만 로맨스’ 이후 쏟아진 응원에 직업에 보람을 느꼈다. 그는 “(연기하기) 쉽지 않았지만, 인물을 통해 표현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확실했다”고 돌아보며 “개봉 후 ‘덕분에 힘을 냈다’는 연락을 많이 받았다. 누군가에게 살아갈 수 있는 원동력을 주고 (상처를) 치유해 줄 때면 배우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현대인의 바쁜 일상 속에서 연기로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다는 점은 배우만이 가지는 특권이다. 무진성은 “멋지고 슬픈 이야기의 전달자가 된다는 게 굉장히 보람 있는 일”이라며 “글로벌 OTT로 더 많은 사람에게 전달할 수 있게 됐다. 많은 공감을 받으며 그들에게 새로운 감정을 느끼게 할 수 있어 뿌듯하다. 좋게 봐주신다는 것을 내가 표현한 인물의 이야기 잘 전달됐다는 의미로 알고 더욱 보람을 느낀다”라고 말했다.
고등학교 때 연기를 배우기 위해 서울을 오가던 학생은 어느덧 얼굴만 봐도 알아볼 수 있는 배우로 성장했다. 그는 “지금도 내가 출연한 작품에 관해 이야기 하고 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어릴 적 꿈꿨던 배우의 모습에 다가서고 있는 것 같다”고 말하며 “더 노력해 한 작품에서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메인 캐릭터를 맡아보고 싶다. 타이틀롤로 인정받는 순간이 나의 궁극적인 목표”라고 바람을 전했다.
정가영 기자 jgy9322@sportsworld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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