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할리우드가 영화를 만드는 방식이 달라지고 있다. 과거에는 할리우드 영화를 수입해 국내 극장에 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면 이제는 한국의 공간과 제작진, 기술, 감독, 원작, 자본이 제작 단계부터 결합하고 있다. 한국은 완성된 영화를 소비하는 시장을 넘어 글로벌 프로젝트의 제작 파트너로 영역을 넓히는 중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부고니아(2025)다. 이 작품은 장준환 감독의 2003년 영화 지구를 지켜라!를 영어로 리메이크했다. 단순히 원작 판권만 할리우드에 판매한 프로젝트는 아니다. CJ ENM은 영어 리메이크를 기획하고 각본을 개발하는 단계부터 참여했으며 미국의 스퀘어페그·엘리먼트픽처스와 함께 공동제작을 맡았다. 해외 배급은 유니버설픽처스 산하 포커스피처스가 담당했다. 한국의 원작과 자본, 기획·개발 능력이 할리우드의 제작·배급 체계와 결합한 형태다. 부고니아는 제82회 베네치아국제영화제 경쟁 부문, 제98회 아카데미 시상식에 후보로 오르며 한미 공동제작의 성공적인 사례로 주목받았다.
◆서울·부산이 할리우드 촬영장으로
한국과 할리우드가 만난 초기 방식은 국내 로케이션이었다. 2015년 개봉한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은 서울 세빛섬과 상암동·마포대교·강남대로·문래동 철강단지 등에서 촬영됐다. 서울 도심이 극 중 대규모 추격전과 액션 장면의 배경으로 활용됐다.
2018년 개봉한 블랙 팬서는 부산을 택했다. 광안대교와 광안리·자갈치시장 일대가 등장하면서 부산의 도시 풍경이 세계 관객에게 소개됐다. 넷플릭스 시리즈 엑스오, 키티도 서울을 주요 배경으로 촬영했다. 해외 작품 속 한국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아시아 도시로 대체되는 데서 벗어나 서울과 부산이라는 실제 도시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해외 제작진이 국내에서 촬영하려면 장소 섭외부터 촬영 허가, 교통 통제, 장비 대여와 운송까지 현지 제작 기반이 필요하다. 촬영·조명·미술·세트·분장·의상·로케이션 관리·통역 등 다양한 분야의 국내 제작진도 합류한다. 숙박과 운송, 장비 사용을 통해 국내에서 제작비가 집행되고 해외 프로젝트를 경험한 인력과 업체에는 새로운 경력이 쌓인다.
영화진흥위원회와 지역 영상위원회도 외국 영상물의 국내 촬영을 유치하기 위한 지원 사업을 운영해왔다. 외국 작품의 한국 촬영은 도시 홍보뿐 아니라 일자리와 제작비 유치, 국내 제작진의 글로벌 작업 경험을 동시에 확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한국이 할리우드의 촬영 장소에서 제작 기반을 제공하는 협업 파트너로 이동하는 출발점이다.
◆할리우드 화면 완성하는 한국 기술과 제작진
해외 제작 현장에서 한국이 담당하는 영역은 촬영 지원을 넘어 후반작업으로 확장됐다. 시각특수효과(VFX)와 디지털 색보정, 음향, 가상 프로덕션 등은 촬영 이후 영화의 완성도를 결정하는 핵심 공정이다. 한국 기업도 이 분야에서 해외 프로젝트를 직접 수주하고 있다.
매크로그래프는 성룡과 리롄제가 출연한 영화 포비든 킹덤의 VFX 제작에 참여했다. 당시 제작진은 홍콩과 뉴질랜드, 캐나다 등 여러 국가의 업체를 검토한 뒤 한국 업체와 협업했다. 국내 VFX 기업이 할리우드 규모의 프로젝트에 기술력을 선보인 초기 사례로 꼽힌다.
덱스터스튜디오는 미국·일본·헝가리 합작 영화 나이츠 오브 더 조디악의 VFX 제작에 참여했다. 덱스터스튜디오는 당시 헝가리 제작사를 상대로 55억원 규모의 VFX 용역 계약을 체결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국내에서 축적한 시각효과 기술이 해외 제작사의 직접 수주로 이어진 사례다.
◆감독·원작·자본까지…제작 안쪽으로 들어간 한국
한국 감독들은 일찍부터 할리우드 제작 체계 안에서 작업해왔다. 김지운 감독은 라스트 스탠드(2013), 박찬욱 감독은 스토커(2013)를 연출했다. 봉준호 감독은 설국열차(2013)와 넷플릭스 영화 옥자(2017)를 거쳐 워너브러더스의 미키 17(2025)을 선보였다. 할리우드에서 개발된 프로젝트에 한국 감독이 합류하는 방식뿐 아니라 감독의 연출 세계와 글로벌 자본·배급망이 결합하는 형태로 범위가 넓어졌다.
이제는 한국의 글도 할리우드 제작의 출발점이 되고 있다. 한국 영화와 웹툰, 소설의 판권을 판매하는 데서 나아가 국내 기업이 영어 각본 개발과 제작사 구성에 직접 참여하는 방식이다. 지구를 지켜라!에서 출발한 부고니아는 이러한 변화를 압축해서 보여준다. 한국 원작의 독특한 설정을 가져가면서 CJ ENM이 영어 각본 개발과 기획, 투자 및 공동제작에 참여했다.
한국 자본의 역할도 달라지고 있다. 과거에는 해외 완성작의 국내 배급권을 확보하기 위해 일부 자금을 투자하거나 리메이크 판권을 판매하는 방식이 많았다. 최근에는 기획·개발 단계부터 자금을 투입하고 공동제작사로 이름을 올리는 프로젝트가 나오고 있다. 국내 기업은 할리우드의 제작 시스템과 메이저 스튜디오의 세계 배급망을 활용하고, 할리우드는 한국의 원작과 창작자, 제작 기술과 자본을 결합할 수 있다.
다만 한국 자본과 원작이 들어갔다고 제작 주도권까지 자동으로 확보되는 것은 아니다. 최종 편집권과 지식재산권, 속편·리메이크 권리, 흥행 수익을 어떻게 나누는지에 따라 공동제작의 실질은 달라진다.
한국은 더 이상 할리우드 영화에 장소와 인력만 제공하는 시장이 아니다. 기술과 기획, 이야기, 자본을 함께 투입하며 제작 과정 전반에 참여하는 파트너로 영역을 넓히고 있다. 이제 ‘메이드 위드 코리아’의 성패는 참여 여부를 넘어 한국이 제작 과정에서 얼마나 주도적인 역할과 권리를 확보하느냐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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