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인 프로 사이클 선수도 다리 혈관 질환 앞에서는 페달을 멈춰야 했다.
스페인 출신 정상급 사이클 선수 엔릭 마스는 지난해 투르 드 프랑스 도중 왼쪽 다리 통증으로 대회를 포기했다. 처음에는 고강도 경기와 낙상에 따른 근육·관절 문제로 볼 수 있었지만, 정밀검사 결과는 왼쪽 다리의 혈전정맥염이었다.
소속팀 모비스타는 당시 마스의 혈전정맥염이 외상 후 발생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휴식과 고강도 신체활동 중단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마스는 남은 시즌을 모두 포기한 뒤 같은 왼쪽 다리에 형성된 정맥류성 혈관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았다. 수술은 별다른 문제 없이 마무리됐고 이후 훈련과 경기 복귀 절차를 밟았다.
해당 사례는 하지정맥류가 오래 서서 일하는 중장년층에게만 발생하는 질환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다리 근육이 발달한 운동선수나 꾸준히 자전거를 타는 사람도 외상과 유전적 요인, 정맥판막 이상 등이 겹치면 정맥질환을 겪을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자전거는 생활과 밀접한 운동이다. 어린 시절 자전거로 학교를 오가던 경험부터 출퇴근용 생활자전거, 한강 라이딩, 산악자전거, 장거리 국토종주까지 즐기는 연령대도 폭넓다. 건강을 위해 시작한 운동이지만 라이딩 뒤 다리가 유독 붓거나 한쪽 종아리에 통증이 반복된다면 운동량 탓으로만 넘기지 않는 게 좋다.
◆자전거를 많이 타면 하지정맥류가 생길까
하지정맥류는 다리 정맥 내부의 판막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면서 혈액이 아래쪽으로 역류하고 정맥이 늘어나는 질환이다. 대표적인 위험요인으로는 가족력과 나이, 임신, 비만, 오래 서 있거나 앉아 있는 생활습관 등이 꼽힌다.
자전거 타기 자체는 일반적으로 하지정맥류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보지 않는다. 페달을 밟을 때 종아리 근육이 수축·이완하면서 다리의 정맥혈을 심장 쪽으로 밀어 올리는 ‘근육 펌프’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무리하지 않는 자전거 타기와 걷기는 정맥순환을 돕는 운동으로 활용될 수 있다.
다만 같은 자세로 페달을 밟거나 고강도 훈련을 반복하면 기존 정맥질환으로 인한 다리 피로와 부종이 더 뚜렷해질 수 있다. 낙상으로 다리에 충격을 받거나 탈수와 장거리 이동, 운동 후 장시간 움직이지 않는 상황이 겹치면 혈전성 질환도 별도로 살펴야 한다.
김건우 민트병원 인터벤션센터 원장(인터벤션 영상의학과 전문의)은 “자전거 운동은 종아리 근육을 사용해 정맥순환에 도움을 줄 수 있지만 하지정맥류를 예방하거나 치료하는 운동은 아니다”라며 “이미 정맥판막 역류가 있다면 운동 후 다리 무거움과 부종, 야간 경련이 반복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근육통과 혈관 통증, 어떻게 구분할까
장거리 라이딩 뒤 생기는 일반적인 근육통은 허벅지와 종아리 근육을 눌렀을 때 뻐근하고, 양쪽 다리에 비슷하게 나타나며 휴식 후 수일 안에 완화되는 경우가 많다.
반면 하지정맥류가 있으면 오후나 운동 후 다리가 무겁고 당기는 느낌, 발목 부종, 열감, 가려움, 야간 근육경련 등이 반복될 수 있다. 피부에 푸른 혈관이나 울퉁불퉁한 정맥이 보이기도 하지만, 겉으로 혈관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 ‘잠복성 하지정맥류’도 있다.
혈전정맥염은 피부 가까이에 있는 정맥에 염증과 혈전이 생긴 상태다. 해당 혈관을 따라 붉어지거나 열이 나고, 만지면 단단한 끈이나 멍울처럼 느껴지면서 심한 압통이 생길 수 있다.
표재성 혈전정맥염은 비교적 가볍게 지나가는 사례도 있지만 혈전의 위치와 범위에 따라 심부정맥혈전증이나 폐색전증과의 연관성을 평가해야 한다. 임상 증상만으로 혈전 범위를 정확히 판단하기 어려워 초음파검사를 통한 확인이 권고된다.
특히 한쪽 다리만 갑자기 붓거나 통증이 심해지고, 피부색 변화와 열감이 동반된다면 운동을 멈추고 진료받아야 한다. 다리 증상과 함께 갑작스러운 호흡곤란이나 흉통, 어지럼증이 발생하면 폐색전증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어 즉시 응급진료가 필요하다.
김건우 원장은 “하지정맥류 통증은 운동할 때만 생기기보다 하루가 지날수록 다리가 무거워지고 쉬거나 다리를 올렸을 때 덜해지는 양상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며 “반대로 한쪽 다리가 갑자기 붓고 특정 혈관을 따라 붉고 단단해졌다면 혈전 여부를 먼저 확인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보이는 혈관보다 ‘역류 이유’ 찾아야
하지정맥류 진단의 중심은 도플러 초음파검사다. 초음파로 피부 밖에 보이는 혈관만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깊은 정맥과 표재정맥의 혈류, 판막 기능, 혈액의 역류 시간 및 속도, 시작과 끝 지점을 살핀다.
검사 결과 판막 역류가 뚜렷하지 않고 증상이 가볍다면 생활습관 조절과 적정 체중 유지, 걷기·자전거 같은 유산소운동, 다리 올리기, 필요에 따른 의료용 압박스타킹 착용 등을 고려할 수 있다.
치료가 필요하면 늘어난 혈관의 모양만 없애는 것이 아니라 역류를 일으키는 원인 정맥을 차단해야 한다. 국내에서는 혈관 상태에 따라 고온의 열로 혈관을 폐쇄하는 레이저/고주파 열폐쇄술, 의료용 생체접착제로 혈관을 붙여 폐쇄하는 베나실, 기계적 자극과 경화제를 병행하는 클라리베인, 플레보그립 등을 적용한다.
김건우 원장은 “겉으로 보이는 혈관이 굵다고 무조건 치료하는 것도, 혈관이 보이지 않는다고 질환이 없다고 판단하는 것도 적절하지 않다”며 “도플러 초음파검사에서 실제 판막 역류와 증상의 연관성이 확인되는지부터 살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자전거를 즐기는 환자라면 라이딩을 무조건 중단하기보다 현재 정맥 상태와 운동 강도를 먼저 평가하는 게 좋다”며 “운동 후 반복되는 부종과 통증을 조기에 확인하면 치료 범위가 커지기 전에 관리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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