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왕과 사는 남자’로 천만 감독에 등극한 장항준 감독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로 돌아와 못다한 단종 이야기를 전했다.
지난 6일 방송된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는 최초로 조선시대를 다루며 <역사특집 홍위, 노산, 단종-왕의 이름을 찾아서> 편으로 원년 MC 장항준 감독이 일일 MC로 나섰다. 리스너로 그룹 프로미스나인 이채영, 가수 적재가 함께 했다.
1452년 5월 14일 훈민정음 창제에 힘을 보탠 것은 물론 측우기 발명, 최첨단 신무기 화차 개발 등 문무를 겸비했던 조선의 5대 임금 문종이 39세의 나이로 승하했다.
문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이는 불과 12세의 어린 단종이었다. 할아버지 세종, 아버지 문종, 어머니마저 여읜 단종은 왕실 내에 보호자가 없는 고아였으나, 어린 나이에도 뛰어난 판단력으로 국정을 주관하는 명석함을 보였다.
그러나 세종의 둘째 아들이자 단종의 숙부인 수양대군이 한명회의 책략에 힘입어 1453년 계유정난을 일으켰다. 김종서를 필두로 모든 정적을 제거한 후 권력을 장악한 그는 영의정과 이조판서, 병조판서를 겸직하며 실권을 쥐었다.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12.12군사반란과 흡사한 모습이 소름을 돋게 했다.
1455년 수양대군의 전횡 속에 주변 사람들의 희생을 막고자 했던 15세의 단종은 조여오는 압박에 결국 옥새를 넘기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수양대군은 7대 임금 세조로 즉위했다.
집현전 출신 성삼문, 박팽년 등은 단종 복위를 은밀히 모의하다 밀고로 적발돼 혹독한 신문을 받았다. 불에 달군 인두로 몸이 지져지는 고문 속에서도 훗날 ‘사육신’으로 불리는 이들은 세조를 ‘나으리’라 칭하며 왕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심지어 박팽년이 그간 제출했던 공문서에는 자신이 세조의 신하임을 뜻하는 ‘신하 신(臣)’ 자를 쓸 때마다 은근히 획 하나를 빼놓아 ‘클 거(巨)’ 자로 적어 올린 사실이 드러나 세조를 더욱 분노하게 했다. 사육신은 결국 사지가 찢기는 거열형에 처해지는 비극을 맞았다.
사육신 사건 이후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등돼 ‘천연 감옥’으로 불리는 영월 청령포로 유배됐다. 비극적인 유배 생활 속 감시를 무릅쓰고 밤마다 강을 헤엄쳐 건너와 외로움을 달래준 영월 호장 엄흥도가 단종의 유일한 위안이었다.
유배지에서도 비극은 멈추지 않았다. 경상도 순흥에서 단종 복위를 도모하던 세종의 여섯째 아들 금성대군의 계획이 탄로나 사약을 받았다. 금성대군은 사약을 받는 그 마지막 순간에도 세조가 있는 한양이 아닌 단종이 있는 영월 쪽을 향해 마지막 절을 올렸다.
결국 단종은 17세의 꽃다운 나이에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했다. 세조실록에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기록됐으나 그 외 모든 문헌에서는 세조에 의한 사사 및 타살로 기록됐다.
단종의 시신은 강가에 버려졌고 역모죄로 몰릴까 봐 누구도 거두지 못했으나 엄흥도는 목숨을 걸고 옥체를 수습해 선산에 묻은 뒤 자취를 감췄다. 이후 영월 백성들은 수백 년간 몰래 묘를 돌보았고, 결국 241년이 흐른 숙종 대에 이르러서야 ‘예를 지키고 의를 잡는다’는 뜻의 ‘단종’이라는 묘호를 찾게 됐다. 훗날 고종 황제는 엄흥도에게 ‘충의공’이라는 시호를 하사했다.
장항준은 단종의 삶을 돌아보며 “그의 삶은 한마디로 '외로움'이 아니었을까”라고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장현성은 “욕망도 권력도 좋지만, 결국 정의를 지키고자 하는 사람을 존경한다”고 말했다.
장현성, 장성규, 장도연 3MC는 “단종을 연민하고 세조에게 분노하는 이유는 약자가 억울하게 희생되는 역사를 원하지 않기 때문”이라며 “그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역사를 기억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지동현 기자 ehdgus1211@sportsworld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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