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보다 더 어울리는 슬로건이 있을까. “우리의 시간은 지금이다(Our time is now).”
마침내 미국 여자프로야구(WPBL)의 문이 열린다. 한국 여자야구의 ‘대들보’ 김라경(뉴욕 하이츠)이 역사적인 첫 순간을 장식한다. 국가대표는 물론, 리틀야구와 남자 대학리그, 일본 무대까지 거침없이 달려온 그가 이번엔 여자야구의 새 시대를 알리는 첫 공을 던진다.
김라경은 2일 오전 7시 미국 일리노이주 스프링필드 로빈 로버츠 스타디움서 열리는 WPBL 개막전에 선발 등판해 로스앤젤레스(LA) 퀸즈를 상대한다. 영화 ‘그들만의 리그’의 배경으로 잘 알려진 전미여자프로야구(AAGPBL)가 1954년 막을 내린 뒤 72년 만에 미국에서 출범한 여자 프로야구 리그 경기다.
등판까지 하루도 채 남지 않았다. 설렘과 긴장이 교차하는 가운데 김라경은 마지막 준비에 한창이다. 지난달 24일 미국으로 건너가 팀에 합류한 뒤 현지 그라운드에 적응하며 컨디션을 끌어올렸다. 출국 전까지도 하남리틀야구단 아이들을 지도하는 한편 틈틈이 개인 훈련을 이어간 바 있다.
김라경은 미국행을 앞둔 당시를 떠올리며 “야구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가게 되는 것 같다. 야구가 있는 곳이 곧 내가 가는 길”이라고 말했다. 코치로서 두 달 넘게 함께한 제자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눌 때 비로소 출국이 실감 났다는 설명이다. 그는 “눈물을 참으며 이야기하다 보니 ‘나 정말 가는구나’ 싶었다”고 돌아봤다.
‘개척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내 여자 선수의 리틀야구 출전 연령을 중학교 1학년에서 3학년까지 늘린 이른바 ‘김라경 특별규정’이 만들어졌을 정도다. 중학생 때부터 국가대표에 발탁되는 등 빠르게 두각을 나타냈다.
나아가 불과 열여덟 살이던 2018년엔 세계 정상급 선수들과 겨뤄 남다른 경쟁력을 입증했다. 당시 세계야구소프트볼연맹(WBSC) 여자야구월드컵에 태극마크를 달고 출전, 4경기 동안 19개 탈삼진을 잡아 이 부문 1위에 올랐다.
시련의 연속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김라경은 2022년 일본 실업팀 아사히 트러스트에 입단한 뒤 팔꿈치를 다쳐 인대접합 수술을 받았다. 2년이 넘어가는 재활 끝에 지난해 한국 선수 최초로 세이부 라이온즈 레이디스에 합류하며 다시 공을 잡았다. 긴 공백을 이겨낸 건 야구를 놓지 않겠다는 집념 덕분이다.
이번 도전에는 가족을 향한 특별한 마음도 담겨 있다. 오랫동안 든든한 응원군이었지만, 큰 수술과 긴 재활을 겪고도 선수 생활을 이어가겠다는 선택까지 선뜻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았을 터. 김라경 역시 그 만류가 자신을 아끼는 마음에서 비롯됐음을 잘 알고 있다.
그는 “주변의 우려에 속상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그럴수록 꿈은 더욱 간절해졌다. 사랑하는 야구를 이대로 쉽게 내려놓을 수는 없었다”며 “가족들에게도 프로선수가 된 만큼 조금만 더 지켜봐 달라고 말씀드렸다. 이제는 선수로서 보여주고 증명해야 한다”고 힘줘 말했다.
WPBL은 원년 시즌을 앞두고 전 세계에서 몰려든 600명 이상의 지원자를 대상으로 드래프트를 열었고, 최종 60명이 유니폼을 입었다. 뉴욕과 LA, 보스턴 헌터스, 샌프란시스코 파이어벨스 등 4개 팀이 15명씩 선수단을 꾸린 것. 김라경은 지난해 드래프트 1라운드 전체 11순위로 뉴욕의 선택을 받았다.
외로운 도전이 아니다. 한국 선수로는 포수 김현아(보스턴)와 내야수 박주아(샌프란시스코)가 3일 오전 8시30분 맞대결을 통해 나란히 WPBL 무대에 첫발을 내디딘다.
첫 시즌의 모든 경기는 이동 없이 로빈 로버츠 스타디움에서만 열린다. 각 팀은 6주 동안 15경기씩 정규리그 일정을 소화한 뒤 포스트시즌에 돌입한다. 경기는 7이닝제로 치르며 알루미늄 배트와 콜드게임 규정을 적용한다. 베이스 간 거리와 투구 거리 등은 남자야구와 같다.
오랜 기다림 끝에 여자야구가 ‘프로’의 이름으로 팬들 곁에 선다. 꿈에 그리던 무대에 오르는 김라경의 감회도 남다를 수밖에 없다. 이곳에 닿기까지의 여정은 곧게 뻗은 길보다 여러 굽이를 품은 비포장도로에 가까웠다. 때로는 덜컹였지만, 그 굽이마다 값진 경험으로 아로새기며 한층 단단해졌다.
오롯이 실력으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겠다는 각오다. 김라경은 “뉴욕에서 좋은 활약을 펼쳐 팀에 꼭 필요한 선수로 인정받고 싶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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