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파른 산에서는 명이와 부지깽이, 삼나물, 참고비가 자라고 깊은 바다에서는 오징어와 홍합, 따개비가 올라온다. 부족한 평지에서는 감자와 옥수수를 길렀고, 울릉도에서 자란 소는 섬의 풀과 약초를 먹었다.
울릉도는 지금도 접근성이 높은 섬은 아니다. 배를 타고 가야만 닿을 수 있다. 뱃길은 날씨의 영향을 받고, 섬 안에는 넓은 평야보다 가파른 산과 골짜기가 많다. 주민들은 계절마다 자연이 내어준 재료를 먹고, 많이 난 것은 말리고 절이고 발효시켜 오래 두고 먹었다. 울릉도의 음식은 제한된 농경지와 불규칙한 뱃길 속에서 형성된 생활의 결과다. 역설적이게도 이 지리적 고립과 척박함은 육지에서는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울릉도만의 독창적인 정체성과 특별함을 길러낸 자양이 됐다.
이 생활의 음식은 최근 파인다이닝의 언어로 다시 쓰이고 있다. 울릉도에서 유일하게 운영되는 파인다이닝 레스토랑인 코스모스 울릉도의 ‘라 울(La 鬱)’에서는 영국과 홍콩 파인다이닝 현장을 거친 구진광 셰프가 울릉도의 식재료와 음식을 현대적인 코스로 풀어내고 있다.
◆울릉도의 땅과 바다, 파인다이닝이 되다
모든 코스는 음양오행의 순환을 식사의 순서로 옮겼다. 에피타이저인 ‘상생의 시작’에서 출발해 금생수, 수생목, 목생화, 화생토, 토생금, 디저트 ‘상생의 조화’로 마무리된다.
독도 새우와 오징어, 문어, 전복, 뿔소라, 따개비 같은 바다 식재료와 약소, 마가목, 더덕, 산나물, 버섯, 홍감자 등 산과 땅에서 난 재료가 한 코스 안에서 교차한다. 울릉도의 특산물을 늘어놓는 데 그치지 않고 재료의 향과 질감, 계절성을 고려해 코스의 흐름 안에 배치했다.
코스모스 울릉도 투숙객을 대상으로 운영하는 라 울은 울릉도의 재료를 미슐랭 셰프의 방식으로 경험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다. 보통 2박 이상 머무는 고객이 많다보니 세 가지 코스를 순차적으로 맛볼 수 있도록 했다. 숙박 기간이 길어질수록 울릉도의 식재료를 다른 조리법과 구성으로 경험하도록 한 조치다. 이는 코스모스 울릉도가 음식을 목적으로 찾아오는 ‘미식 여행지’로 자리 잡겠다는 전략과도 맞닿아 있다.
라 울은 영국 미슐랭 2스타 레스토랑 ‘르 가브로슈’와 홍콩 파인다이닝 ‘토생화’를 거친 구진광 셰프가 이끈다. 지난 3월 라 울의 총괄 셰프를 맡게 된 그는 “울릉도는 한국에서도 가장 독창적인 식재료를 가진 지역이라는 점에서 도전해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는 프렌치 셰프다. 울릉도 음식을 섬세한 프렌치 조리 경험을 활용해 향과 식감, 소스와 접시의 구성을 세밀하게 조율한다. 프렌치를 기반으로 경력을 쌓은 그가 울릉도의 산채와 해조류, 버섯과 발효장을 어떤 언어로 표현하는지가 라 울 음식의 관전 포인트다.
라 울의 음식은 계절마다 변한다. 울릉도에서는 철마다 구할 수 있는 재료가 달라지고, 이런 변화가 코스에도 반영된다. 구 셰프는 “울릉도에서는 계절마다 만날 수 있는 식재료가 다르기 때문에 손님들도 같은 코스가 아니라 계절의 변화를 경험할 수 있다”며 이를 라 울의 차별화된 경쟁력으로 꼽았다.
◆프렌치 셰프가 풀어낸 울릉도식 사찰음식
라 울의 기본 코스가 울릉도의 대표 식재료를 현대적으로 보여준다면, 또 하나 눈에 띄는 구성은 사찰음식을 기반으로 한 코스다. 육류와 오신채를 배제하는 사찰음식의 원칙에 울릉도의 산채와 버섯, 해조류, 발효장을 접목했다.
국가무형유산으로 지정된 사찰음식은 최근 국내뿐 아니라 ‘웰니스’를 지향하는 웨스턴 여행객들에게도 큰 호응을 얻고 있다. 한국적인 전통 요소와 건강을 모두 담고 있어서다. 프렌치 기반의 구진광 셰프는 “사찰음식에 흥미가 생겨 7~8년간 매주 우관 스님을 찾아 배웠다”고 말했다.
그가 지향한 것은 전통 사찰음식의 단순한 재현이 아니었다. 사찰음식의 재료와 조리 원칙을 철저히 따르면서도 향의 배치와 식감, 접시 구성에는 특유의 프렌치 요리 경험을 녹여냈다. 재료 그 자체의 맛과 향을 극대화한 미식을 경험하고 싶다면 이 사찰음식 코스가 제격이다.
◆5년 장부터 36년 씨간장까지…발효가 만든 깊이
울릉도에서 만난 사찰음식의 첫 접시에는 울릉도 미역과 김, 땅두릅, 깻잎으로 만든 계절 부각이 오른다. 볶은 현미를 흙처럼 깔고 부각을 세워 작은 분재를 연상시키는 모습으로 완성했다. 해조류는 울릉도의 바다를, 산채는 섬의 땅을 직관적으로 보여준다. 부각을 하나씩 맛볼 때마다 재료마다 다른 향과 질감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이어 고추장떡과 야생버섯 수프가 나온다. 버섯내음이 확 올라와 입맛을 돋우는 동시에, 오랜 시간 발효한 고추장이 더해진 고추장떡의 기분 좋은 매콤함이 식욕을 한층 높여준다.
구 셰프는 코스 곳곳에 오래 숙성한 발효장을 적극 활용했다. 자극적인 양념 대신 발효장이 만들어내는 깊은 감칠맛으로 음식의 중심을 잡았다. 간장과 된장은 5년에서 10년가량 발효한 것을 사용하고, 36년 된 씨간장도 쓰인다.
이 씨간장으로 고추장을 만들어 고추장떡의 깊은 풍미를 낸다. 발효액 역시 10년 이상 숙성한 것을 활용한다. 오랜 시간과 손이 필요한 재료인 만큼 값도 높지만, 한 숟갈만으로도 음식의 인상을 바꿀 만큼 묵직한 맛을 낸다.
구 셰프의 시그니처로 소개된 버섯 요리가 등장할 차례다. 능이버섯과 백화고, 동충하초꽃 등 여러 버섯을 한 접시에 담고, 버섯을 여러 차례 우린 채수로 맛의 밀도를 높였다. 트러플 오일은 흙과 나무를 연상시키는 버섯의 향을 한껏 끌어올렸다. 육류를 사용하지 않았지만 맛은 묵직했다.
두부와 뿌리채소로 만든 샐러드도 식탁에 오른다. 노란빛 두부 위에 우엉을 올려 맛의 중심을 잡고, 들깨와 된장으로 만든 소스를 곁들였다. 두부의 부드러움과 우엉의 단단한 식감, 비트의 단맛이 순서대로 드러났다. 뿌리채소와 장의 고소함으로 분위기를 전환하는 접시다.
◆파·마늘 없이도 선명… 열매와 향채가 만든 반전
직접 만든 묵에 고소한 잣을 갈아 올린 잣 묵국이 이어진 뒤, 팔레트 클렌저로 등장한 제피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사찰음식이 싱겁고 심심할 것이라는 예상은 기분 좋게 빗나간다. 사찰음식에서는 육류와 함께 파, 마늘 등 오신채를 쓰지 않지만, 그렇다고 음식의 향까지 지워내진 않았다. 제피와 방아, 가죽나물 장아찌처럼 향이 선명한 재료들이 구원투수로 등판한다. 구 셰프는 “제피는 오신채에 포함되지 않는 열매 계열 재료여서 사용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향을 줄이는 대신 향을 만드는 재료와 방식을 바꾼 셈이다. 마늘과 파 없이도 맛의 흐름이 끊기지 않도록 열매와 잎, 장아찌와 발효장을 영리하게 활용했다. 향이 뚜렷하고 강해 한꺼번에 먹기보다 조금씩 음미해야 진가를 알 수 있다.
구 셰프의 프렌치 스타일이 가장 또렷하게 드러난 메뉴는 ‘맑은 토마토 국수’였다. 초계국수를 연상시키는 산뜻한 맛을 냈지만 닭고기는 쓰이지 않았다. 토마토는 매실에 절여 소스를 만들고, 일부는 건조해 맛을 농축했으며, 나머지는 프렌치 콩소메처럼 맑게 걸러낸 채수를 사용하는 등 세 가지 방식으로 입체감을 더했다. 미니 토마토 장식도 귀여움을 더해 눈까지 즐겁다. 버섯과 장, 향채가 이어진 뒤 입안을 깔끔하게 정리하는 역할까지 톡톡히 해냈다.
반상은 울릉도 더덕을 넣은 밥과 냉이 된장국으로 구성했다. 여러 버섯과 뿌리채소, 향채와 발효장을 거쳐온 코스는 밥과 국이라는 익숙한 형식으로 돌아왔다. 더덕의 향과 된장의 구수함이 코스의 끝을 편안하게 잡아줬다.
후식으로는 배 오미자숙과 정과가 등장했다. 배의 맑은 단맛과 오미자의 산미가 입안을 씻어내고, 은은한 단맛의 정과로 식사를 마무리했다. 푹 끓여낸 배에 황금 조각을 더했따.
구진광 셰프에게 왜 사찰음식에 매력을 느꼈느냐고 묻자 “개인적으로 좋아했다”는 직관적인 답이 돌아왔다.
프렌치와 사찰음식은 멀어 보이지만 재료의 잠재력을 끝까지 끌어낸다는 점에서는 닮았다. 방식은 다르지만 하나의 재료를 여러 조리법으로 풀어 맛과 향, 질감을 확장한다는 점은 같다. 프렌치 셰프에게 사찰음식은 익숙한 조리법을 내려놓고 재료를 새롭게 바라보게 하는 제약이자 탐구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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