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마운드가 아닌, 타석에서 자신을 바라봤다. 물론 실제로 배트를 든 건 아니었다. 잇따른 부진 뒤 재정비의 시간을 보내며 ‘내가 타자라면 어떤 투수가 치기 어려울까’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떠올렸다. 프로야구 KT의 아시아쿼터 투수 스기모토 코우키가 비로소 쫓던 답에 가까워지고 있다.
마법사 군단 역사상 첫 아시아쿼터 자원이다. 스기모토는 8일까지 42경기에서 1승2패 9홀드 평균자책점 5.44를 써냈다. 시즌 전체로 보면 아직 만족하긴 어려울 터. 주목해야 할 건 최근 흐름이다. 우상향 그래프를 그려간다. 특히 7월 들어 5경기서 4⅓이닝 비자책을 기록했다. 필승조 고민이 컸던 KT 벤치도 스기모토를 8회 셋업맨 카드로 낙점하며 활용 폭을 넓히고 있다.
일본프로야구(NPB) 경력 없이 자국 독립리그서 활약해 온 그는 KBO리그를 통해 첫 프로 무대에 발을 내디뎠다. 적응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5월 한 달 동안 11경기 평균자책점 8.68에 머무를 정도로 부침도 컸다. 스기모토 역시 “뜻대로 되지 않았던 부분이 많아 힘들었다. 그래도 여러 가지 시도를 하면서 스스로 발견한 점이 많았다. 많이 성장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고 돌아봤다.
처음 겪어본 한국 타자들은 선 굵은 야구로 스기모토를 압박했다. “확실히 힘이 좋다”고 혀를 내두른 그는 “컨디션이 좋은 날 좋은 직구를 던져도 맞아 나가는 경우가 많았다”고 설명했다. 그렇다고 무기가 없었던 건 아니다. 시속 150㎞ 이상 직구에 슬라이더, 포크볼 등 다양한 변화구를 갖췄다. 이강철 KT 감독이 스프링캠프 때부터 그의 구위를 높게 평가한 이유다.
시즌 중에도 사령탑은 공 자체에 대한 믿음을 거두지 않았다. 스기모토에겐 꼭 부응해야 할 신뢰이자 풀어야 할 숙제였다. 그는 “나 역시 내 공에 대한 자신감은 있었다. 그런데 왜 안 되는 것일까를 계속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 감독과의 대화가 힌트가 됐다는 설명이다. 같은 공이라도 타자에게 더 늦게 보이고 더 불편하게 느껴지도록 만드는 쪽으로 생각을 넓혔다. 스기모토는 “한국 타자들이 어떻게 하면 나를 더 어렵게 상대하게 될지를 고민하게 됐다”고 밝혔다. 투구의 기준을 자신에서 타자 쪽으로 옮긴 셈이다.
확실한 전환점은 익산 퓨처스팀(2군)에서 보낸 2주였다. 스기모토는 두 달 전 1군 엔트리에서 빠져 잠시 숨을 고를 시간을 가졌다. 단순한 휴식은 아니었다. 구종 레파토리를 비롯해 타자와의 승부 과정, 마운드 위에서 타자에게 보이는 모습 등을 두루 점검했다.
그는 “2군은 여러 가지를 시험해 볼 수 있는 장소였다. 그동안 머릿속에 이제 그 정리해놨던 것은 물론, 해보고 싶은 것은 원 없이 다 해봤다”며 “내가 타석에 선다면 어떤 모습의 투수가 치기 어려울까를 생각하면서 준비했다”고 말했다.
마침내 안정감을 되찾고 있지만, 스기모토는 아직 고개를 저었다. 그는 “지금의 모습에 전혀 만족하지 않는다. 앞으로도 분명 여러 과제가 나올 것”이라며 “현상 유지에 머물지 않고 계속 찾아가면서 더 도전해보고 싶다”고 힘줘 말했다.
지난 5일 롯데전에선 KBO 데뷔 첫 승리투수가 되는 기쁨도 맛봤다. 다만 승리 자체에 들뜨기보다는 자신의 역할에 더 무게를 뒀다. 스기모토는 “항상 마운드에 올라갈 때 무실점으로 내 역할을 다하자고 생각한다. 승리는 우연히 따라온 결과”라면서도 “팀에서도 많이 축하해주셨다”고 활짝 미소 지었다.
특히 한글로 적힌 첫 승 기념구 케이스를 꺼내 보이며 “운영팀 신동원 과장께서 챙겨주셨다. 감사한 마음을 꼭 전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후반기 과제는 꾸준함과 체력이다. 현재 페이스라면 시즌 70이닝 이상도 바라볼 수 있다. 전반기를 3위로 마친 KT는 상위권 경쟁의 한복판에서 치열한 순위 싸움을 이어가야 한다.
스기모토의 쓰임새 역시 필승조를 넘어 동료들의 국제대회 차출 상황에 따라 선발투수까지도 넓어질 수 있다. 그는 “선발이든 중간이든 주어진 임무에 최선을 다하겠다. 맡겨주시는 역할을 잘 해내 후반기에도 좋은 모습을 보여드리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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