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시안 팝’ 신설이 일으킨 인종화·유리천장 논란
그래미 어워즈가 신설한 베스트 아시안 팝 뮤직 퍼포먼스 부문이 세계 음악계의 뜨거운 논쟁거리로 떠올랐다. 아시아 음악의 영향력을 인정하고 수상 기회를 넓히기 위한 제도라는 주최 측 설명과 비서구권 음악을 별도의 틀에 가두는 새로운 장벽이라는 비판이 팽팽히 맞선다.
논쟁의 핵심은 명확하다. K-팝(한국)과 J-팝(일본), C-팝(중국)은 아시아라는 이유만으로 같은 음악 범주에 묶일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더 나아가 이미 글로벌 메인스트림에서 경쟁하는 아시아 아티스트들을 별도의 지역 카테고리로 구획하는 것이 진정한 포용인지, 아니면 격리인지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이 이어지고 있다.
방탄소년단(BTS)의 그래미 출품 거부는 이 논쟁을 수면 위로 끌어올린 결정적 계기가 됐다. BTS는 지난달 29일 “음악이 지역이나 언어로 구분되기보다 음악 그 자체로 들리고 사랑받을 수 있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신설 부문을 직접 명시하지는 않았으나 지역과 언어라는 자격 조건을 직격하면서 그래미의 새로운 분류 체계가 지닌 모순을 정확히 겨냥했다는 분석이다.
◆아시아 음악 알리겠다는데…왜 ‘차별’ 논란 커졌나
베스트 아시안 팝 뮤직 퍼포먼스는 그래미가 지난 6월 신설한 부문이다. K-팝과 J-팝, C-팝 등을 대상으로 한다. 여기에 하나 이상의 아시아 국가 언어가 유의미하게 사용되어야 출품 자격이 주어진다. 그래미를 주관하는 레코딩 아카데미는 아시아 팝 음악이 세계 음악산업에서 차지하는 영향력이 커진 만큼 이를 별도로 조명하기 위해 부문을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표면적으로는 아시아 음악가들의 수상 기회가 늘어난 것처럼 보인다. 기존 주요 부문에서 주목받지 못했던 아티스트들이 독자적인 무대를 얻을 수도 있다. 문제는 분류 기준이다. K-팝, J-팝, C-팝은 산업 구조와 창작 문법이 전혀 다르다. 음악적 본질이 아닌 지리적 위치와 언어라는 외연적 기준만으로 이들을 획일화했다는 점에서 서구 중심적 오만이 반영됐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미국 빌보드 역시 BTS가 입장문에서 지역과 언어를 직접 언급한 점에 주목했다. 언어적 제약을 자격 요건으로 둔 신설 부문의 허점을 짚어낸 것이다. 실제로 이 기준을 적용하면 영어 가사로 발표되어 빌보드 핫 100 정상에 오른 BTS의 히트곡 스윔(SWIM)은 오히려 아시안 팝 부문 대상에서 제외되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세계 시장에서 성공한 아시아 아티스트의 음악을 무엇을 기준으로 아시아 음악이라고 규정할 것인지부터 모호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외신들의 비판도 잇따랐다. 영국 가디언은 BTS의 성명을 두고 “절제되었으나 대단히 날카로운 비판”이라고 평했고, AP통신은 해당 부문이 “아시아 아티스트에게 또 다른 인종화된 장벽이 될 수 있다”는 현지 목소리를 전했다. 인도 출신의 그래미 3회 수상 작곡가 리키 케이는 롤링스톤 기고문에서 “아시아 아티스트들을 본상 무대에서 격리해 변방에 묶어두는 행위이자, 다양성의 탈을 쓴 차별”이라고 강력히 비판했다.
◆별도 부문은 사다리인가 유리천장인가
반면 그래미 측은 이러한 비판에 선을 긋는다. 하비 메이슨 주니어 레코딩 아카데미 CEO는 BTS의 출품 거부 이후 “장르별 부문이 있다고 해서 아티스트가 올해의 앨범이나 올해의 노래 같은 본상 부문에서 경쟁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밝혔다.
실제 사례도 있다. 그래미는 2023년 아프리카 음악을 대상으로 베스트 아프리칸 뮤직 퍼포먼스 부문을 신설했다. 당시에도 아프리카 음악을 별도의 지역 범주 안에 가둔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그러나 초대 수상자인 타일라는 이 부문을 통해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지역별 부문이 기존 시상 체계에서 충분히 조명받지 못했던 음악을 소개하는 통로가 될 수 있다는 평가가 나오는 배경이다. 라틴 팝 부문에서 출발한 배드 버니 역시 올해 2월 그래미에서 올해의 앨범을 수상했다. 지역 부문이 본상으로 진출하는 디딤돌이 될 수 있음을 입증했다.
그러나 포브스는 이 같은 해명의 결정적 맹점을 꼬집었다. “그래미는 두아 리파나 에드 시런을 위해 베스트 유러피언 팝 부문을 신설하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영국을 비롯한 유럽 출신 백인 영어권 가수들은 별도의 지역적 이름표 없이 ‘팝’으로 경쟁한다. 반면 아시아와 아프리카 음악에는 지역명을 붙인 별도 부문을 만드는 방식이 계속된다면 형평성 논란을 피하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결국 신설 부문은 비서구권 음악을 주류로 끌어올리는 사다리가 아니라 진입을 가로막는 유리천장으로 작동할 위험을 안고 있다.
◆오래된 ‘백인 중심’ 그래미 논란도 다시 수면 위로
이번 논쟁이 커지는 배경에는 그래미를 둘러싼 오래된 불신도 자리하고 있다. 그래미는 지속적으로 미국 주류 음악산업과 백인 아티스트에게 친화적인 폐쇄적 평가 시스템이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그래미는 아티스트가 출품하면 심사 단체인 레코딩 아카데미 15000여명의 회원 투표를 거쳐 수상자를 결정한다. 이 과정에서 회원 구성이 미국 주류 음악산업에 편중돼 새로운 장르와 비서구권 음악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다는 지적이 반복됐다.
2020년에는 위켄드와 드레이크 등이 흑인 아티스트에 대한 그래미의 평가 방식에 문제를 제기했다. 특히 위켄드는 블라인딩 라이츠(Blinding Lights)가 세계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고도 이듬해 그래미 후보에 한 부문도 오르지 못하면서 논란의 중심에 섰다. 그래미는 이후 후보 선정 방식을 개편했다.
그러나 대표성 논란은 해소되지 않았다. 2025년 그래미 신규 회원의 자기 식별 비율 가운데 아시아·태평양계는 5%에 그쳤다. 심사 집단이 변화하는 세계 음악시장의 구성과 다양성을 충분히 반영하고 있는지를 둘러싼 의문이 남는 대목이다.
올해 시상식에서도 K-팝 데몬 헌터스 OST 골든(GOLDEN)이 한 부문 수상에 그치고, 세계적 흥행을 거둔 로제의 ‘아파트(APT.)’가 고전하는 등 비서구권 음악에 대한 미온적 평가는 계속됐다. 물론 개별 작품의 수상 여부만으로 차별을 단정할 수는 없다. 다만 이미 차트와 스트리밍·라이브 투어 시장 전체를 평정한 아시아 음악이 여전히 변방의 특수 장르로 취급받는 현실이 개선되지 않는 한, 그래미를 향한 진정성 논란과 글로벌 아티스트들의 이탈은 앞으로도 계속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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