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수 정해영(KIA)의 시계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통산 149세이브를 쌓은 클로저였지만, 지금은 ‘마무리’라는 이름에 자신을 묶어두지 않는다. 7회든, 8회든, 때로는 6회까지 팀이 필요로 하면 기꺼이 마운드에 오른다. 다시 붙잡은 답은 단순하다. 어떤 역할이든, 어느 순간이든 자신에게 주어진 이닝을 막고 내려오는 일에 몰두할 따름이다.
호랑이 군단의 뒷문을 대표해 온 이름이다. 2020년 1차 지명으로 입단한 정해영은 데뷔 2년 차부터 마무리로 자리 잡았고, 지난해까지 5년 연속 20세이브 이상을 수확했다. 특히 2024년엔 31세이브를 올려 이 부문 정상에 오르기도 했다. 그해 한국시리즈 우승을 책임진 마지막 아웃카운트도 그의 손에서 나왔다. 20대 초중반의 나이에 이미 굵직한 이정표를 차곡차곡 세워온 셈이다.
그렇기에 올 시즌 흔들림은 낯설었다. 정해영은 지난달 11일 1군 엔트리에서 빠지기 전까지 4경기 평균자책점 16.88로 고전했다. 가장 큰 문제는 제구였다. 스트라이크보다 볼이 많았다. 이 시기 스트라이크 비율은 47.3%에 그쳤다.
선수 본인도 고개를 끄덕이는 대목이다. 자동 투구 판정 시스템(ABS)에 온 신경을 빼앗겼다. “잡생각이 많았었다”고 운을 뗀 그는 “존에서 공이 하나씩 빠지는 것에 너무 일희일비했다. 타자와 싸워야 하는데, ABS와 싸웠던 것 같다”고 돌아봤다.
카운트를 잡지 못하니, 마운드 위 리듬도 좀처럼 좋아지기 어려웠다. 볼넷을 주게 되고, 심리적으로도 크게 쫓겼다. 결국 퓨처스팀에서 재정비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정해영은 “안 좋아서 내려왔으니까, 올라가서 한 번 더 안 좋으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독하게 마음먹고 돌아왔다”고 말했다.
효과는 있었다. 11일 만에 돌아온 정해영은 확실히 달라졌다. 복귀 후 6경기에서 7이닝 무실점을 써냈다. 이 기간 내준 볼넷은 1개뿐이고, 탈삼진은 9개다. 스트라이크 비율도 73.4%까지 올라갔다. 시즌 평균자책점은 4.66까지 낮췄다.
복귀 후 슬라이더 비중이 늘었고, 한층 더 날카로운 궤적을 그리기도 했다. 직전 시즌엔 의도하지 않은 컷패스트볼(커터) 구사로 화제를 모았는데, 이번에도 스위퍼처럼 좌우 변화폭이 큰 공을 던져 이목을 끌었을 정도다.
정해영은 “팬분들이 항상 관심 있게 봐주시는 것 같다. 안 좋으면 안 좋은 대로, 좋으면 좋은 대로 관심을 가져주신다”며 웃었다. 다만 특별한 변화를 가져간 것은 아니라고 했다. 그는 “(슬라이더) 그립을 새롭게 하거나 구종 추가는 없었다. 계속하던 것처럼 똑같이 던지는데, 최근 들어 강하게 꺾이는 각이 나오는 듯싶다”고 말했다.
정해영이 더 크게 보는 지점은 따로 있다. 직구로 스트라이크를 만들기 시작하자 변화구 활용도 자연스럽게 살아났다는 설명이다. 그는 “구위보다는 타자와 카운트 싸움이 된다는 점이 긍정적”이라며 “그전에는 직구로 카운트 싸움이 안 되다 보니 볼넷도 주고, 많이 맞고, 심리적으로 흔들렸다. 지금은 직구로 카운트 싸움이 되기 때문에 변화구도 잘 활용할 수 있게 됐다”고 설명했다.
더 이상 9회만 기다리지 않는다. 현재 보직은 셋업맨이다.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 새 마무리 성영탁이 견고한 활약으로 위기의 팀을 지탱했기 때문이다.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정해영은 “부진해서 2군에 내려갔고, 그동안 투수 형들, 동생들이 잘해줬다. 특히 (성)영탁이가 워낙 잘하고 있기 때문에 제 욕심을 앞세울 상황은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어떤 상황이든 중요하지 않은 이닝은 없다. 6회도 중요하고, 7회도 중요하고, 8회도 중요하다”며 “이범호 감독님께도 언제든 던질 준비가 돼 있다고 말씀드렸다”고 덧붙였다.
팀 승리를 위한 발판이 될 수 있다면 상관없다. 멀티이닝도 한 차례 수행했다. 마무리라는 이름보다, 팀과 동료들에게 ‘다음’을 열어줄 수 있는 아웃카운트에 집중하겠다는 뜻이다. 정해영은 “주어진 이닝을 깔끔하게 막으면, 지고 있을 땐 다음 공격에서 찬스가 올 수 있고 이기고 있을 땐 좋은 흐름을 이어갈 수 있다”고 했다.
마무리에 애착이 없는 건 아니다. 동시에 자신에게 당연히 주어져야 할 자리가 없다는 것도 알고 있다. 결국 다시 자신의 힘으로 증명해야 하는 시간이다. 정해영은 “마무리를 5년 동안 해왔다. 하지만 프로 무대는 늘 경쟁해야 하는 곳”이라며 “내 힘, 내 실력으로 이어갈 수 있어야 한다. 지금보다 더 잘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힘줘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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