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굳이 힘든 길을 자청해서 가냐고요? 누군가는 꼭 해야 할 일이니까요.”
한국 여자축구의 현주소는 ‘정체’와 ‘열악’ 두 단어로 표현할 수 있다. 구조도, 문화도, 관심도 여전히 제자리걸음이다. 상금이 ‘0원’인 대회도 있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 분명한 이유가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도 안 되고 비전도 없다. 그럼에도 무거운 사명감과 함께 낭만을 좇는다. 여자축구가 조금이라도 더 나아졌으면 하는 바람뿐이다. ‘이단아’라고 손가락질받기도 했으나 그뿐이다. 도전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다. 2년새 15명의 선수를 해외로 진출시켰다. 선수들이 외국에서 경험을 쌓고, 돌아와 후배들에게 전해주길 바라는 마음이다. 어느 날 문득 고개를 들었을 땐, 선수들이 관중으로 꽉 찬 경기장을 마음껏 누비고 있길 바란다. ‘선순환하는 한국 여자축구’를 위해 김성희·이겨레 이결스포츠 공동대표가 앞장선다.
◆멈춘 발자국
“무슨 여자가 축구를 하냐.” 김 대표가 20년 전 축구를 시작할 때 들었던 말이다. 지금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인식이 바뀌었다. 여성도 스포츠를, 좋아하는 것을 추구할 수 있는 환경이 됐다. 하지만 축구를 업으로 삼기엔 여전히 어렵다.
한국 여자축구의 최상위 무대, WK리그에 붙는 수식어다. 하지만 프로가 아닌 실업리그다. 현재 8개 팀으로 리그가 진행되고 있지만, 불안정하다. 지난해엔 창녕WFC가 예산 문제로 해체 위기에 놓였다. 다행히 전남 강진으로 연고를 이전하면서 전남강진스완스 이름으로 새출발했다. 아쉬움은 더 많다. 평균 관중 수가 400명대(지난 시즌 기준)다. 티켓을 판매하는 구단은 수원FC가 유일하고, 중계는 TV가 아닌 유튜브로 송출된다. 선수 연봉 문제도 꾸준히 제기됐다. 드래프트 라운드별 연봉은 출범부터 2025년까지 고정이었다. 1라운드 지명 선수는 3000만원을 받았다. 아무리 잘 해도 연봉상한선은 5000만원. 17년이 지나 올해가 돼서야 각각 3400만원, 6000만원으로 인상됐다.
이 대표는 “과거에도, 지금도 여전히 아쉬운 부분이 많다. 현재 일부 동남아 리그엔 의무 트레이너 3명, 코칭스태프 5명, 매니저와 재활 트레이너 등이 있는 팀도 많다. 한국과 비교가 될 수밖에 없다”면서도 “환경이 나아져야 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불평만 가져서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문화 자체가 다르지만 독일 2부 리그서 뛰는 선수들이 대략 1800(310만원)유로를 받는 걸로 알고 있다. 실력은 우리보다 높지만, 임금은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다”고 짚었다.
선수들 역시 아쉬움에 목소리 높이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안주’라는 폭풍에 휩쓸리기도 한다. 김 대표는 “비슷한 임금에 훈련 환경을 비교하면 한국에서 뛰는 게 솔직히 더 편할 것이다. 해외에 나가면 언어의 장벽도 있고, 누가 운동을 시키는 시스템보다 자기 스스로 알아서 해야 한다. 또 기본기를 강조하는 일본 같은 경우엔 재미없다고 느끼기도 한다”며 “실제로 갔다가 금방 포기하고 돌아오는 선수도 많았다. 그러다 보니 ‘외국에 나가서 도전해야겠다’가 선수들 꿈의 기본값이 아니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전부라고 얘기할 수 없지만, 안타깝게도 눈높이만 높은 일부 선수도 있다. 프로의 세계에선 실력이 당연히 우선”이라며 “해외 진출이 마냥 좋다고만 할 수 없다. 이름값만 좇으면 큰 무대를 가더라도 출전 기회를 받지 못한다. 일부 어리거나 눈높이가 있는 친구들은 이름값을 따라간다. 원한다고 해서 다 갈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우리는 선수에게 먼저 선택지를 준다. 경기 못 뛰어도 높은 곳에 갈지, 경기를 뛸 수 있는 곳에 갈지, 그다음 스텝을 준비할 수 있는 곳에 갈지. 선수들 역시 자신의 현주소를 정확하게 인지하고, 똑똑한 선택을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결국 발전을 위한 3박자가 모두 흔들리고 있다. 이 대표는 “한국 여자축구는 인재가 없어서 정체된 것이 아니라, 그들을 담아낼 구조와 잠재력을 증명할 기회가 없어서 잠시 멈춰있는 것”이라며 “행정적인 부분부터 지도, 선수들의 의지와 이들을 바라보는 시선까지 모두가 더 나아져야만 발전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한걸음 더
선수 출신 김 대표는 지도자, 이 대표는 약 8년간 해외 축구 산업에서 종사하다 2021년에 만났다. 충남인터넷고에서 각각 코치와 전력분석원으로 힘을 모았다. 둘은 현장에서 마주하는 여러 현실적인 어려움과 직면했다. 지도자, 운영자로서 개선할 수 없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결국 직접 나섰다. 선수 개인의 발전을 겹겹이 쌓아 조금씩 흐름을 바꾸겠다고. 그렇게 이결스포츠 에이전시는 2023년 여름 탄생했다.
물론 시작은 쉽지 않았다. 유럽으로 이적한 선수는 현실의 벽은 물론 언어 장벽까지 마주하며 고개를 숙여야했다. 거듭된 이적에 선수도, 에이전시도 지쳤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함께 손을 잡고 끝까지 버텼다. 그렇게 하나씩 매듭을 풀어가고 있다. 그 결과 선수들이 먼저 눈빛을 반짝이고 있다. 새싹도 베테랑도 구분이 없다. 김 대표는 “축구를 그만두고 편하게 살 수 있을 정도로 연금이 보장된 선수에게 연락이 왔다”며 “연금을 포기해도 괜찮으니 다시 축구를 하고 싶다는 말이었다. 굳은 의지 덕분에 이적도 빠르게 성사됐다”고 전했다.
단순히 해외 진출이라는 그럴싸한 포장지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 WK리그에서 뛴 경험이 있는 정은욱(ZFK스파르타크)은 축구에 대한 의지로 해외 진출을 결심했다. 그는 “마음 가짐의 차이도 있겠지만, 해외서 어려움을 이겨내며 축구 내외적으로 새로 배운 부분이 많다. 지금에서야 진정한 프로 선수가 된 것 같다”고 미소 지었다.
이 과정에서 이결스포츠는 번 돈보다 쓴 돈이 더 많다. 적자에 차도 팔고 금괴까지 팔았다. 김 대표는 “생각보다 훨씬 쉽지 않은 길이라는 것을 매일 느끼고 있다. 선수들의 미래가 걸려있지 않았다면 아마 벌써 포기했을 것”이라면서 “그래도 돌아갈 수 없는 지점까지 왔다고 생각한다. 꺾이기 전까지 밀고 나가겠다”고 다짐했다.
이결스포츠가 향하는 길에는 선수의 이적만 있는 것이 아니다. 여자축구를 알리기 위한 노력도 이뤄지고 있다. 축구 클리닉이 대표적이다. 지난해 3회차를 맞이했다. 국가대표는 물론 전현직 선수들이 직접 참여해 참가자와 함께 땀을 흘린다. 입소문을 타고 인기가 많아졌다.
김 대표는 “선착순 150명 모집이었는데 300명가량이 신청해주실 정도로 관심을 받았다”며 “초등학생부터 성인까지 다양한 연령대 참가자들이 참여했다. 열기가 뜨거웠다”고 전했다. 이어 “프로그램에 참여해준 선수들에게 너무 고맙다”며 “비시즌에 4시간 정도 에너지를 쏟아야 하니 많이 힘들었을 거다. 선수들이 힘들어서 다음부터 안 오려고 하면 어떡하나 걱정이 될 정도로 열심히 임한다”고 전했다.
또한 이결스포츠는 최근 서울 광진구 소재 ‘더바름 진 스포츠 클리닉’과 협약을 맺었다. 김 대표는 “병원 협약을 통해 선수들에게 보다 체계적인 관리와 편의를 제공할 수 있게 됐다”며 “단순한 협약뿐만 아니라 김민정 선수는 회사를 통해 개인 스폰서십을 받는 결과를 만들어냈다. 계약을 중개하는 것을 넘어 선수들이 더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게 우리의 목표”라고 짚었다.
◆90분을 채우는 그날까지
호주에서 2026 아시아축구연맹(AFC) 여자 아시안컵이 한창이다. 신상우 감독이 이끄는 한국 여자축구대표팀은 오는 18일 오후 6시 일본과 대회 4강전을 치른다.
눈에 띄는 장면이 있다. 지난 8일 호주와의 조별리그 맞대결, 신상우호는 강호를 상대로 3-3 무승부를 기록하며 조 1위를 확정지었다. 이날 스타디움은 어느 경기장 보다 뜨거웠다. 약 7만명의 호주 홈 팬들이 모두 모였다. 김 대표는 “한국에도 이런 날이 오길 바란다”고 미소지었다.
이를 위해서는 시스템, 문화, 선수들의 인식까지 모두가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야 한다. 김 대표는 “해외에 진출한 선수들이 버텨서 살아내고, 다시 한국으로 와 그 성장을 돌려주길 바란다”며 “협회와 연맹도 더 적극적으로 나서줬으면 한다. 관행적인 탁상행정에서 과감히 벗어나 저변 확대를 위한 실질적인 대안 마련, 즉각 반영하는 강력한 실행력이 함께 되길 바란다”고 전했다.
사실 이결스포츠를 향한 시선은 그리 곱지만 않다. 지적하는 현실에 누군가는 불편한 진실을 마주했을 터. 김 대표는 “모두가 같을 수 없고,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틀리다가 아닌 다르다 정도로 봐주셨으면 한다”면서 “마음은 같다. 여자축구가 무너지지 않도록 함께 나아갔으면 좋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함께 발전하는 청사진을 그린다. 이 대표는 “2023년 부산 동명공고 여자축구부를 창단했다. 당시 교감 선생님이 정말 애써주셨는데, 지도자 비위에 따른 선수 수급 실패로 해체됐다. 교감 선생님은 이 일로 불이익을 받으셨다. 이런 세상에 누가 총대를 메려고 하겠나”라면서도 “후회하진 않는다. 다시 해도 고칠 수 없는 부분은 많이 없을 것 같지만 ‘이렇게 할 걸’이라는 아쉬움이 남는 부분은 있다”고 말했다.
이어 “머지않은 미래에 한국 여자 축구의 프로화가 실현된다면, 에이전시의 역할을 넘어 다시 한 번 구단 운영에 도전하고자 한다”며 “시행착오는 충분히 거쳤다. 변하지 않는 환경 탓만 하지 않고 직접 새로운 길이 있다는 시선을 제시하기 위해 한 발 더 뛰겠다”고 각오했다.
[ⓒ 세계비즈앤스포츠월드 & sportsworldi.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