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에는 상상하기 어려웠던 대통령의 예능 출연은 이제 낯설지 않다. 미디어 환경이 급속도로 발전하고 그 영향력이 커지면서 친근한 이미지를 구축해 국정 동력을 확보하려는 시도로 읽힌다.
최고 권력자로서 엄숙하고 권위적인 모습을 유지하는 데 중점을 뒀던 과거에는 대통령이 대중매체에 직접 나서기보다는 공식 연설이나 신문, 라디오와 같은 제한된 채널을 통해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을 선호했다. 하지만 시대가 바뀌면서 미디어 환경이 다양해지고 국민과의 직접 소통이 중요한 정치 전략으로 떠오르자 대통령의 예능 출연은 점차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받아들여지게 됐다.
◆김대중·노무현, 예능 출연 포문
대선주자 신분의 유력 정치인이 정치 풍자 코미디가 아니라 직접 예능에 출연한 첫 사례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다. 김 전 대통령은 야당 총재이던 1996년 MBC ‘일요일 일요일 밤에–이경규가 간다’에 이례적으로 출연했다.
진행자 이경규를 비롯한 제작진이 섭외를 위해 아침 일찍 김 전 대통령 자택 근처를 배회했다. 갑작스러운 방송 출연 요청에도 김 전 대통령은 흔쾌히 일산 자택을 공개하며 인터뷰에 응했다. 가장 좋아하는 가수로 서태지를 언급하고 이희호 여사와 공원을 산책하는 등 소탈한 모습을 보여줬다. 당시만 해도 민주화 투사 이미지가 강했지만 방송에서 소탈한 이웃집 할아버지 같았다는 긍정적인 평가가 많았다.
현직 대통령의 예능 출연 첫 사례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다. 취임 첫해이던 2003년 7월 MBC ‘느낌표’에 권영숙 여사와 함께 동반 출연했다. 노 전 대통령은 청소년의 고민을 청취하고 책을 추천한 것과 더불어 MC를 맡은 김용만, 유재석과 스스럼없이 대화하고 농담을 하는 등 편안한 모습으로 눈길을 끌었다.
권 여사와 첫 만남부터 데이트를 이어가게 된 사연, 청소년 시절 키가 작아 외모 콤플렉스를 가졌던 일, 어릴 적부터 책을 좋아했다는 사연과 군 복무 시절 독서 경험 등 개인사를 유머러스하게 풀어내면서 특유의 인간적인 면모를 굳히고 대통령으로서 엄숙한 이미지를 완화하는 데 성공했다. 방송 이틀 전 노 전 대통령은 대통령 역대 최초로 KBO리그 올스타전에서 시구를 하며 이목을 끌었기에 당시 방송 출연은 더욱 화제를 모았다.
이후 2005년에는 KBS1 교양 프로그램 ‘도전! 골든벨’에도 출연하며 대중과의 소통을 이어갔다. 청와대 녹지원에서 촬영을 진행했고, 노 전 대통령은 출연이 예정되지 않았는데도 깜짝 등장해 문제 출제자로 나선 다니엘 헤니와 악수를 나눴다.
◆이명박·박근혜·문재인, 취임 이후 신중
이명박 전 대통령은 재임 기간 예능에 출연하지 않았다. 이 전 대통령은 취임 첫해인 2008년 예능 출연을 추진했다가 철회했다. 어린이날을 맞아 MBC ‘무한도전’ 출연진을 청와대로 초청할 계획이었지만 미국산 소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가 거셌던 시점이라 여론을 고려해 포기했다. 예능 대신 2010년 9월 추석을 앞두고 KBS 교양 프로그램 ‘아침마당’에 출연했다. 이 전 대통령은 당선인 신분에도 이 프로그램에 출연한 바 있는데 당시 “지금의 내가 있는 것은 희생정신이 강한 어머니 덕”이라며 눈물을 흘렸다.
박근혜·문재인 전 대통령도 대선 후보 시절에만 예능에 출연했다. 2012년 대선을 앞두고 두 사람 모두 SBS ‘힐링캠프’에 일주일 간격으로 나란히 출연했다. 당시 인간적 면모와 솔직한 이야기로 화제를 모았지만 재임 중에는 예능 출연을 하지 않았다. 대선 후보 시절 예능 출연을 통해 친근한 이미지를 구축하는 데 활용했지만 막상 대통령이 되고 난 이후 신중한 모습을 보였다.
박 전 대통령은 SBS ‘심장이 뛴다’에 잠시 등장해 소방관 체험 중인 출연진을 격려한 게 전부다. 다만 박 전 대통령과 문 전 대통령은 취임 첫해인 2013년과 2017년 KBO리그 한국시리즈에 시구자로 나서며 대중과의 거리감을 좁히고자 했다.
◆윤석열·이재명, 후보 시절부터 예능 나들이 적극적
윤석열 전 대통령과 이재명 대통령은 2022년 대선후보 시절 SBS ‘집사부일체’·KBS2 ‘옥탑방의 문제아들’ 등 나란히 예능에 적극적으로 출연했다. 윤 전 대통령은 직접 김치찌개·불고기·달걀말이를 만들어 출연진에게 대접해 윤주부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2022년에는 당선인 신분 최초로 예능 프로그램인 tvN ‘유 퀴즈 온 더 블럭’에 출연했다.
방송에선 학창시절, 사법고시 9수, 검사 시절 등과 관련한 이야기가 주로 나왔다. 2023년엔 김건희 여사와 함께 SBS TV동물농장에 출연해 용산 대통령 관저에서 반려동물들과 더불어 사는 일상을 공개했다. 그해 KBO리그 개막전에서 김 여사와 함께 대구삼성라이온즈파크를 찾아 한국 야구 국가대표 점퍼를 입고 시구를 하기도 했다.
이재명 대통령도 정치인으로서 예능 효과를 톡톡히 누렸다. 성남시장 시절인 2017년 SBS 부부 예능 ‘동상이몽’에 고정 출연하면서 예능 나들이에 나섰다. 인권변호사 출신의 강성 행정가라는 딱딱한 이미지가 있었지만 이를 통해 이미지를 순화하고 전국구 인지도를 올렸다.
유력 정치인의 예능 출연은 대중친화 수단의 하나로 자리 잡았지만 사실 좋은 효과만 내는 것은 아니다. 양 진영 간의 이념싸움이 극단적으로 이뤄지면서부터 끊임없이 논란의 대상이 됐다. 국가정보자원관리원 화재와 맞물린 이 대통령의 냉장고를 부탁해 출연에 앞서 윤 전 대통령은 유퀴즈 출연 당시에도 외압 논란이 불거지며 출연의 적절성을 놓고 큰 사회적 파장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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