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달 28일 마지막 4막 4회분 공개로 완결된 넷플릭스 한국드라마 ‘폭싹 속았수다’가 여전히 화제를 뿌리고 있다. 근래 들어선 ‘폭싹 속았수다’를 ‘도둑 시청’한 중국서 일고 있는 ‘김선호 챌린지’ 열풍, 극중 인물이 앓고 있는 것으로 설정된 질병 다발성 골수종에 대한 소개 등 다양한 차원에서 되새김질이 이어지는 추세. 이처럼 언론미디어 조명이 끊이지 않는 건 그만큼 ‘폭싹 속았수다’가 한국 대중문화계의 2025년 1/4분기 최대 화젯거리였단 점을 잘 알려준다.
그런데 여기서 좀 더 살펴볼 부분이 있다. 글로벌 OTT인 넷플릭스 콘텐츠라면 피해갈 수 없는 글로벌 시청 성적에 대해서다. 물론 ‘폭싹 속았수다’는 넷플릭스 공간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뒀다. 넷플릭스 공식 순위에서 첫 3일치로 10위 진입한 뒤 차례로 3위, 3위, 5위, 4위를 기록했다. 비영어 콘텐츠 순위에선 1위를 두 차례나 차지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한국드라마 누적 시청시간 순위에서도 3억1600만 시간으로 벌써 역대 5위에 올랐다. 넷플릭스 한국 오리지널로선 가장 긴 축인 16회 분량이기에 시청시간 면에서 ‘회차 버프’를 받았단 평가도 있지만, 아직 공개 초반인데 이 정도면 충분히 뛰어난 성과인 건 맞다.
그러나 ‘폭싹 속았수다’에서 진정 흥미로운 부분은 전체 성적이 아니라 서비스 지역별 성적 부분이다. 쉽게, 기존 한류의 텃밭인 중동 포함 아시아 전반과 라틴아메리카 지역에서 주로 선방했다. 대중문화 대형시장인 미국과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서유럽 지역에선 최고 순위 10위 내에 들어본 일이 없다. 본래 해당 지역들에선 한국드라마가 약세라고 하기에 지난 1월 공개돼 큰 인기를 모은 ‘중증외상센터’는 상황이 달랐다. 미국 8위, 프랑스 3위, 독일 5위, 스페인 6위 등 일반적으로 ‘서구’라 지칭되는 지역에서도 아시아권과 비등한 성적을 거뒀다.
차이가 뭘까. 상당부분 아시아와 라틴아메리카의 유사한 문화적 취향 탓이란 해석이 많다. 특히 TV드라마의 경우 유독 여성 서사, 그중에서도 옛 시대 여성들이 겪어온 핍박과 억압, 극복을 다룬 서사를 이들 지역에서 공통적으로 유난히 즐긴단 것이다. 한국선 이런 계통을 일종의 서브장르로서 ‘여성 수난극’이라 따로 칭하기도 한다. 그만큼 그 수도 많고 상업적으로도 나름 스테디한 코드란 얘기다. 그런데 그게 한국만의 일도 아니란 것.
돌이켜보면 이 같은 흐름을 암시하는 사건들은 지난 수십 년간 여럿 있었다. 먼저 ‘드라마 한류’의 첫 ‘빅뱅’을 꼽으려 할 때 많이들 2002년 KBS2 ‘겨울연가’를 떠올리곤 하지만, 엄밀히 ‘겨울연가’는 아시아 최대 대중문화시장인 일본시장을 개척한 점 탓에 크게 부각됐을 뿐, 일본 및 중화권, 동남아시아, 그리고 중동 등 서아시아에 이르기까지 ‘아시아 통폐합’을 이룬 첫 한국드라마는 2003년 MBC ‘대장금’으로 봐야한단 견해가 지배적이다. 그리고 ‘대장금’은 앞선 ‘옛 시대 여성들이 겪어온 핍박과 억압, 극복’에 대한 얘기가 맞다.
한편, ‘대장금’ 이전 ‘아시아 통폐합’에 성공했던 드라마로 꼽히는 것이, 비록 한국선 일본 대중문화 개방 이전 일이어서 와닿지 않겠지만, 1983년 일본 NHK ‘오싱’이었다. 당시 세계 63개국에 수출돼 중화권과 몽골, 베트남, 태국, 이란, 이집트 등지에서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고, 특히 지금은 가장 충성도 높은 한류 텃밭인 이란에선 시청률 90%를 기록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리고 ‘오싱’ 역시 위 ‘옛 시대 여성들의 겪어온 핍박과 억압, 극복’ 테마다.
그러고 보면 라틴아메리카 역시 이 흐름과 일치하는 구석이 있다. 여전히 라틴아메리카 텔레노벨라의 최대 글로벌 성공사례로 꼽히는 1976년 브라질 드라마 ‘노예 소녀 이사우라’를 필두로, 과거 시대의 각종 사회적 차별과 억압을 여성 입장에서 다루는 게 인기 드라마 코드 중 하나다. 반면 미국과 서유럽 등은 이와 상당히 다르다. 특히 미국서 이 같은 ‘여성 수난극’ 계통이 인기를 얻은 때는 1925년과 1937년 두 차례 영화화된 ‘스텔라 댈러스’ 시절, 길게 봐도 머빈 리로이 감독의 ‘애수’가 인기를 끌던 1940년대 정도까지다. 그리고 ‘스텔라 댈러스’는 1990년 베트 미들러 주연 ‘스텔라’란 제목으로 한 차례 더 리메이크된 바 있지만, 이때는 흥행에 참패했다. 1990년쯤 되면 이미 절대 먹힐 수 없는 소재이자 테마였던 셈이다.

그럼 ‘여성 수난극’이 여전히 상업적으로 먹히며 그 영향을 담고 있는 ‘폭싹 속았수다’ 성공까지 함께 나누는 아시아권과 라틴아메리카 사이엔 어떤 사회문화적 유사성이 있는 걸까. 명확히 답이 나오긴 어렵고 여러 다양한 의견이 있을 수 있겠지만, 근본적으로 둘 다 가족주의와 집단주의가 여전히 강한 문화권이란 점 정도는 짚어볼 만하겠다. 그런 유사성이 어떻게 지난한 여성 서사에의 애착으로 이어지는 것인지는 좀 더 관찰해봐야 할 부분이겠지만 말이다.
어찌됐든 ‘여성 수난극’은 서구 입장에서 사뭇 기묘하게 받아들여지는 모양이다. 즉각 공감이 어려워 흥행 코드로까지 이어지진 못하지만 비평적 측면에선 높게 평가받는 구석이 있다. 예컨대 2017년 한 언론이 실은 이경미, 박현진, 윤가은 등 여성 영화감독 3인의 대담 기사에서도 관련 대목이 등장한다. 윤 감독은 “해외 영화제에 가면 ‘대부분의 한국영화는 왜 여성 캐릭터를 폭력적이고 잔인하게 대하느냐’는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고 설명하고, 이에 박 감독은 “‘여성 수난극’이라 할 만한 한국영화가 해외에서 각광받기도 하니까”란 의견을 덧붙인다.
그러고 보면 해당 계열에 속하는 애플TV+ 드라마 ‘파친코’도 상업적으론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했지만 비평적으론 크게 성공, 크리틱스 초이스 시상식 최우수 외국어 시리즈상 수상, 미국영화연구소(AFI) 선정 올해의 10대 드라마 선정 등 쾌거를 거둔 바 있다. 더 멀리 가면 1984년 한국영화 중 최초로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선정됐던 영화 역시 ‘여인잔혹사 물레야 물레야’였다. 제목이 많은 걸 알려준다.
K컬쳐의 활로는 다양한 차원에서 모색되는 게 유리하고, 또 다양한 양상으로 전개되는 쪽이 건강한 것만은 분명하다. ‘오징어 게임’이 먹히는 해외시장이 있는 반면 ‘폭싹 속았수다’를 보다가 실신할 듯 눈물을 쏟으며 열광하는 해외시장도 따로 존재하는 쪽이 더 유리하고 건강하며 다양하고 다층적 전략 구축에 도움이 된다. 물론 현상에 대해 아직 미스터리한 부분들이 많지만, 일단 현상이 확인된 지점부터 차근히 살펴보고 전략을 수정해가야 할 필요가 있다. 어느 분야든 글로벌 산업이란 으레 그 정도 품은 아끼지 않아야 지속될 수 있는 법이다.
/이문원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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