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월드=김진엽 기자] ‘편하게 잠드소서.’
대한민국 축구 역사상 최고의 멀티플레이어로 평가받는 고(故) 유상철 전 감독이 눈을 감았다.
췌장암으로 투병 중이던 유상철 전 감독은 지난 7일밤 세상을 떠났다. 한국을 넘어 아시아를 대표했던 인물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한국은 물론 전 세계 축구계가 슬픔에 빠졌다. 하늘의 별이 된 축구 영웅의 발자취를 돌아본다.
◆멀티플레이어, 그 자체
유상철 전 감독은 멀티플레이어 그 자체였다. 골키퍼를 제외한 모든 포지션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기록이 이를 증명한다. 수비수(1994년), 미드필더(1998년), 공격수(2002년) 전 포지션에 걸쳐 프로축구 K리그 베스트 11에 선정됐다. 1998시즌에는 득점왕을 거머쥐었으며 2013년에 한국프로축구연맹이 발표한 K리그 30주년 레전드 베스트 11 미드필더로 뽑히기도 했다.
시작부터 화려했다. 1994년 울산현대 유니폼을 입고 프로 무대와 연을 맺은 유 전 감독은 울산에서 9시즌 동안 활약하며 142경기에서 37골 9어시스트를 기록했다. 1996년과 2005년 울산의 K리그 우승을 함께했다. 여러 포지션을 소화하며 팀의 살림꾼으로 제 몫 이상을 해냈다. 실력을 인정받은 유 전 감독은 J리그에서도 활약했다. 요코하마 F.마리노스에서 두 차례 J리그 우승을 경험했다. 가시와 레이솔에서도 두각을 나타낸 바 있다.
◆한국의 첫 월드컵 승리에 이바지
유 전 감독의 가치는 태극마크를 달고도 계속됐다. A매치 통산 124경기(역대 네 번째 센츄리 클럽 가입자)에 출전한 유 전 감독은 18골을 기록했다. 1994 히로시마 아시안게임을 통해 주전으로 발돋움했고, 1998 국제축구연맹(FIFA) 프랑스 월드컵 벨기에전에서 골도 기록했다.
백미는 2002 한일월드컵 폴란드전이다. 당시 1-0으로 앞서던 한국은 폴란드의 추격에서 벗어나기 위한 추가골이 필요했다. 그때 유 전 감독의 발끝이 빛났다. 통쾌한 중거리 슈팅으로 골망을 흔들었고 두 골 리드를 잘 지킨 한국은 사상 첫 월드컵 승리를 기록했다. 유 전 감독이 양팔을 뻗으며 환하게 웃는 얼굴은 전 국민에게 각인됐다.
◆지도자로서도 성공
유 전 감독은 2006년 은퇴 후 지도자의 길을 걸었다. 2009년 춘천기계공업고등학교 축구부 감독으로 첫발을 내디딘 후 2011년 대전시티즌(현 대전하나시티즌)과 연을 맺으며 처음으로 프로팀을 지휘했다. 이후 울산대학교, 전남드래곤즈를 거쳤다.
이때까지만 해도 평가는 좋지 않았다. 현역 시절 스타였던 이는 지도자로서 성공하기 힘들다는 격언에 굴복하는 듯했다. 그러나 2019년 인천 지휘봉을 잡으면서 여론은 바뀌었다. 유 전 감독은 모두가 “올해는 힘들다”는 하위권 인천을 이끌고 잔류 역사를 썼다.
그해 11월 췌장암 판정을 받고도 만들어낸 기적이었다. 특유의 형님 리더십과 적재적소의 기용이 빛을 봤다. 전설적인 선수에 이어 훌륭한 지도자가 탄생하는 분위기에서 병마가 유 전 감독을 덮쳤다. 그리고 투병 1년8개월여 만에 눈을 감았다.
◆대표팀의 묵념
한국 축구계의 큰 별이 지자 현역 국가대표들이 먼저 하늘로 떠난 선배를 추모하는 시간도 마련됐다. 파울로 벤투 감독이 이끄는 A대표팀은 9일 오후 8시 고양종합운동장에서 스리랑카와 2022 FIFA 카타르월드컵 아시아지역 2차 예선을 치른다.
대한축구협회와 아시아축구연맹(AFC)이 협의해 경기 전 전광판에 헌정 영상을 틀고 묵념을 진행한다. 출전 선수들은 검정 암밴드를 착용하고 벤치에 있는 감독 및 코치진은 검정 리본을 단다. 또 유 전 감독의 대표팀 백넘버인 ‘6번’을 기려 킥오프부터 전반 6분까지 응원을 하지 않는다.
wlsduq123@sportsworldi.com 사진=사진공동취재단·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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