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여자야구의 새 역사가 담장 너머에 아로새겨졌다. 대표팀 내야수 박주아가 걷어 올린 호쾌한 타구가 펜스를 넘어갔다. 국제대회서 한국 여자야구 선수가 처음 그린 ‘담장 밖 아치’였다.
박주아는 26일 오전 미국 일리노이주 록퍼드의 리벳츠 스타디움에서 열린 호주와의 2026 세계야구소프트볼연맹(WBSC) 여자야구 월드컵 조별리그에 3번타자 겸 유격수로 선발 출전했다. 0-6으로 뒤진 3회 초 2사 1, 2루에서 풀카운트 승부를 펼친 그는 연속 파울로 끈질기게 버틴 뒤 좌월 3점 홈런을 터뜨렸다.
한국은 3-13으로 패했지만, 박주아가 팀의 모든 득점을 책임졌다. 한국여자야구연맹에 따르면 이 홈런은 대표팀이 국제대회서 기록한 최초의 담장 밖 홈런이다. 동시에 여자야구 월드컵에서 나온 한국의 첫 홈런이기도 하다.
국제무대에서 홈런 기록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2019년 아시아야구연맹(BFA) 여자야구 아시안컵 파키스탄전에선 내야수 신수정과 어재인, 포수 이빛나가 인사이드 더 파크 홈런을 써낸 바 있다. 심지어 이번 대회에도 출전한 베테랑 어재인은 당시 두 차례나 그라운드를 크게 돌았다.
2025년 대회에서도 외야수 윤여빈이 스리랑카를 상대로 3타점짜리 그라운드 홈런을 만들었다. 모두 장타성 타구에 빠른 발을 더해 완성한 결과였다. 다만 한국이 출전한 2008년 포함, 앞선 5번의 월드컵에선 인사이드 더 파크 홈런조차 나오지 않았다.
파워는 오랫동안 한국 여자야구의 약점으로 꼽혔다. 타고난 체격에서 앞선 세계 강호들과의 격차가 뚜렷했던 대목이다. 외야수의 머리를 넘기는 타구조차 쉽게 나오지 않았다. 기동력으로 수비의 빈틈을 파고들 수는 있어도, 강력한 타구를 그려내며 담장을 넘기는 장면은 좀처럼 볼 수 없었다.
마침내 박주아의 한 방이 오랜 갈증을 풀었다. ‘한국 여자야구 선수의 힘으로는 담장을 넘기 어렵다’는 케케묵은 시선에 선명한 균열을 낸 것. 이 울림은 박주아 개인에만 머물지 않는다. 함께 뛰고 있는 대표팀 동료들은 물론, 국내서 야구를 꿈꾸는 소녀들에게도 ‘우리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순간이다.
박주아는 한국 여자야구의 ‘새 얼굴’로 주목받고 있다. 정상급 스포츠 에이전시 리코와 손을 잡았고, 예능 프로그램 ‘골 때리는 그녀들’에 출연하며 대중적 인지도도 높였다. 최근엔 “한국의 스포츠 소녀들이 가장 동경하는 선수 중 한 명”이라는 평가도 심심치 않게 나온다.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건 선수로서의 가파른 성장세일 터. 지난 2023년에 이어 두 번째 월드컵에 나선 박주아는 첫 대회서 5경기 타율 0.083에 머물렀다. 이번엔 다르다. 4경기에 모두 주전 유격수로 출전해 타율 0.455, 1홈런 7타점 OPS(출루율+장타율) 1.480을 기록 중이다.
미국전에서 안타를 신고, 캐나다전서 두 차례 출루한 뒤 홍콩전에서는 3안타 4타점으로 폭발했다. 이어진 호주전에선 한국 여자야구 새 역사의 주인공으로 우뚝 섰다.
나아가 자신의 장타력이 세계 무대서도 통할지를 두고 품었던 의문부호까지 지운 뜻깊은 아치였다.
정작 박주아는 이번 대회를 앞두고 출국 직전까지도 자신의 강점이 세계 무대에서 통할지를 확신하지 못했다. “국내에서는 중심 타선에서 장타를 생산하는 것이 내 주된 임무였다. 하지만 미국 리그 선수들과 경쟁할 때도 그 모습을 그대로 살릴 수 있을지 모르겠다”며 “기대 반 걱정 반이다. 팀이 원하는 모습에 빠르게 적응하고 싶다”고 털어놨을 정도다.
72년 만에 부활한 미국여자프로야구(WPBL)서 어떤 유형의 선수로 살아남을지를 두고 내놓은 솔직한 속내였다. 이제 그 답을 경기장에서 직접 써 내려가고 있다. 다음 달 소속팀인 샌프란시스코 파이어벨스 합류를 앞둔 박주아가 남은 월드컵 여정과 이어질 WPBL 무대에서 어떤 궤적을 그릴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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