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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원의 쇼비즈워치] 대본집 불티…바야흐로 ‘정체성의 시대’

입력 : 2022-03-06 18:00:00 수정 : 2022-03-06 14:0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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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BS 드라마 ‘그 해 우리는’이 종영 한 달여를 넘어선 지금 다시 화제에 오르고 있다. 넷플릭스 등 OTT 성적 때문이 아니다. 특이하게도 출판계에서 또 다른 반향을 일으키고 있어서다. 2일 이나은 작가가 쓴 ‘그 해 우리는’ 대본집 1권은 출간 즉시 교보문고 2월 셋째 주 베스트셀러 2위에 올랐다. 1월 중순부터 예약판매를 시작해 1, 2권 합쳐 벌써 8만 부 정도 팔려나갔단 후문. 요즘처럼 출판계가 위축된 상황에 엄청난 수치다. 아니, 출판호황 시절에도 TV드라마 대본집이 이 정도로 팔려나간다는 건 좀처럼 상상하기 어려웠다.

 

 이에 대본집을 출간한 출판사 측 관계자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일반 단행본은 분야마다 고정 독자층이 있는 반면, 드라마․영화 대본집은 작가․감독 지망생뿐 아니라 불특정 다수의 시청자를 겨냥한다”면서 “평소 책을 잘 읽지 않는 독자라도 드라마의 열혈팬으로서 대본집을 ‘책’이라기보다 ‘굿즈’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흥미로운 해석이다. 이 부분을 좀 더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확실히 TV드라마나 영화 대본집을 일반 독자들이 순수 ‘독서’ 목적으로 구매한다는 건 현 시점 다소 어색한 일이다. 과거 해외 희곡집이 출판계에서 일정수준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던 건, 그들 연극이 상시 상연되는 것도 아니고 상연된다 해도 공연장까지 가서 볼 여건이 늘 마련되는 건 아니기에 희곡집을 통해 다소 부족하나마 대리 충족시켜주는 기능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후발주자 영화 대본집 등도 그와 유사한 차원에서 제공됐던 부분이 크다.

 

 그러나 2000년대 이후 영화나 TV드라마는 DVD 소장이나 온라인 감상 등으로 ‘어느 때나’, 또 ‘어디서나’ 원하면 바로 감상할 수 있는 여건이다. 굳이 텍스트로 적어내린 버전이 필요하진 않다. 물론 영상으로 보는 것과 텍스트로 보는 건 감흥이 달라 따로 상품가치가 존재한단 입장도 있을 수 있지만, 그럼 왜 그런 요구가 2010년대 이전엔 딱히 발생하지 않아 상품화된 대본집 자체가 거의 없었는지 설명해주진 못한다. 그때와 지금 차이는 하나다. ‘굿즈’란 상품개념이 문화시장에 들어와 어느 정도 뿌리 내린 시점이냐 아니냐 차이.

 

 ‘굿즈’ 개념에 대해 좀 더 살펴보자. 굿즈를 단순히 특정 대중문화 아이콘 또는 콘텐츠의 파생상품 정도로만 이해해선 곤란한 구석이 있다. 굿즈 개념에서 가장 대표적인 아이돌 굿즈를 떠올려 볼 때, 사실 굿즈 대부분은 소위 ‘쓸모’는 없다. CD로 음악 듣는 사람도 없고 포토카드도 그 자체론 인터넷 상에서 얼마든지 파일로 돌아다닌다. 그 외에 다른 굿즈도 대부분 마찬가지다. 심지어 장식용으로 세워놓고 감상할 만 한 거리도 못되는 경우가 많다.

 

 그럼 왜 사들이는 걸까. 굿즈의 궁극적 효용은 엄밀히 ‘정체성’ 확인 차원에 가깝기 때문이다. 점차 특정 아이콘 혹은 콘텐츠를 좋아한다는 취향과 기호 자체를 자신의 중요한 ‘정체성’ 요소로서 인식하는 경향이 짙어지는 추세다. 그러면서 각종 관련 굿즈 구입을 통해 그런 기호=정체성을 계속 재확인하는 과정이 문화소비 일종으로서 가치를 얻는 흐름. 그리고 그게 팬덤 문화가 보여주는 신종 양상들 중 가장 대표적인 특성이기도 하다.

 

 물론 해외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미국서 가장 많이 팔리는 영화 대본집만 봐도 그렇다. 잘 씌어진 대본이어서 문학적 가치가 높다든가, 일대 흥행을 거둔 대히트영화 대본이라든가 하는 것들이 가장 잘 팔리는 게 아니다. 그만한 흥행작은 아니고 엄밀히 비평적 평가가 높은 것도 아니지만 어찌됐건 매우 충성스러운 팬덤이 성립된 영화 대본집이 가장 잘 팔린다. 예컨대 ‘신비한 동물사전’이나 ‘카운슬러’처럼 원작자 팬덤이 탄탄한 경우 또는 ‘웻 핫 아메리칸 썸머’ ‘나이트메어 3’ ‘파이널 데스티네이션’ 등 컬트적 인기 기반으로 탄탄한 팬덤을 꾸린 영화 대본집 등이다. 모두 근본적으론 굿즈 기능이라 보는 게 맞다.

 

 따지고 보면 그동안에도 ‘사실은’ 이 같은 굿즈 개념으로 팔려나간 서적들이 생각보다 많다. ‘그때’는 그런 식으로 해석되지 않았을 뿐이다. 예컨대 2016년 국회서 진행된 테러방지법 반대 필리버스터 속기록을 담은 ‘필리버스터: 민주주의, 역사, 인권, 자유’가 베스트셀러에 오른 일을 들 수 있다. 그저 속기록 전문을 편집 없이 담아낸 서적인데다 1344페이지 분량, 3만3000원 고가임에도 예약판매 첫 날 알라딘 종합 베스트셀러 1위를 차지했었다. 국회사무처 홈페이지에 무료로 일반 공개된 내용이어서 자료구비 차원이었다고 보기도 힘들고, 사실상 ‘정치적 정체성’ 확인 차원 굿즈로서 팔려나갔다 보는 게 설득력 있다.

 한편, 또 주목해볼 만한 부분은 이 같은 ‘굿즈형 서적’ 주 소비층이다. 먼저 ‘그 해 우리는’ 대본집 구매자는 교보문고 집계로 여성이 77.1%로서 압도적 비중을 차지한다. 연령 포함하면 20대 여성(33.4%)과 30대 여성(20.5%)이 전체 소비자 절반 이상을 차지한단 보도다. 그러고 보면 위 ‘필리버스터: 민주주의, 역사, 인권, 자유’ 역시 당시 알라딘 집계로 구매자 78.8%가 여성, 구매자 중 37.5%가 20대 여성, 30.9%가 30대 여성으로 드러났었다. 애초 출판시장 자체가 교보문고 2019년 구매자 집계로 60%가 여성인 점에 비춰 봐도 확실히 여성층, 특히 2030 여성층이 이들 ‘굿즈형 서적’에 유난히 호응도가 높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큰 차원에서 보면, 이른바 ‘노스탤지어 상품’ 역시 굿즈 맥락에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지난 2월24일 재출시된 ‘포켓몬빵’이 일주일 만에 150만 개를 판매한 상황도 현 30대 남성층 ‘노스탤지어 상품’으로서 일종의 굿즈 열풍이라 볼 수도 있다. 1990년대 후반 첫 판매 당시에도 동봉된 포켓몬 스티커를 모으기 위한 굿즈 성격이 강해 스티커만 취한 뒤 빵은 버리는 행태 등으로 사회문제가 됐던 상품이다. 그러고 보면 남성층은 굿즈를 주로 ‘노스탤지어 상품’에 집중해 소비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출판시장에서도 ‘공포의 외인구단’ 등 이른바 ‘추억의 만화’ 소비가 4050 남성층에서 뚜렷하단 점 등으로 잘 알 수 있다.

 

 그렇게 개개인의 성장배경, 문화적 기호, 정치적 성향 등 수많은 ‘정체성’ 요소들이 모여 지금의 굿즈 시장을 이루는 형태다. 어떤 의미에선 문화시장 전체가 ‘굿즈의 시대’, 아니 ‘정체성의 시대’로 접어드는 시점이라 볼 수도 있다. 그만큼 각박한 세상살이 속 ‘나’라는 존재의 본질과 개별성, 차별성 등을 스스로 확인하고 또 확인받고 싶어 하는 시대라 볼 수도 있겠다. 이 같은 요구에 대응하는 문화산업 전반의 갖가지 전략들이 필요한 때다.

 

/이문원 대중문화평론가

 

사진=SBS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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