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미디는 처음부터 약속된 거짓말이다. 무대에 올라 부장님 행세를 한다고 관객이 재직증명서를 요구하지 않는다. 부부 역할을 맡았다고 혼인관계증명서를 확인하지도 않는다. 모두가 설정이라는 사실을 알고, 그 안에서 마음껏 웃는다. 개그맨으로 무대에 섰던 나는 그 약속의 힘을 안다. 그런데 일상을 보여준다는 방송에서는 사정이 달라진다. 실제로 벌어진 일이라고 믿고 웃었던 장면에 의문이 생기면, 웃음보다 먼저 떠오르는 말이 있다. ‘내가 뭘 본 거지?’ 같은 설정이라도 시청자에게 어떤 약속을 하고 보여줬느냐에 따라 반응은 전혀 달라진다.
지난 한 프로그럄에서 방송 된 즉흥 여행 논란도 이 문제를 생각하게 한다. 제작진은 촬영 지원이나 협찬을 받지 않았다고 설명했다가, 이후 금전적 지원은 없었지만 현지 행정 절차와 촬영 진행에 협조를 받았다고 밝혔다. 촬영 협조를 받았다는 사실만으로 여행 전체가 조작됐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해외 촬영에는 안전과 진행을 위한 준비가 필요하다. 다만 시청자가 받아들인 ‘즉흥’과 제작진이 설명하는 ‘즉흥’ 사이에 얼마나 거리가 있었는지는 따져볼 일이다. 제작진에게 당연한 준비가 시청자에게도 충분히 설명됐는가. 논란의 핵심은 그 간격에 있다.
방송을 해본 사람으로서 준비와 구성이 필요하다는 말은 이해한다. 카메라는 저절로 켜지지 않고, 출연자의 하루가 방송 분량에 맞춰 흘러가지도 않는다. 긴 시간을 줄이고, 잘 들리지 않는 말에는 자막을 넣고, 상황을 이해하도록 순서를 정리해야 한다. 시청자도 그 정도는 안다. 자는 사람의 얼굴이 여러 각도에서 잡힌다고 카메라가 밤새 혼자 걸어 다녔다고 믿는 사람은 없다. 문제는 제작의 편의를 위한 준비를 넘어, 시청자의 판단을 바꾸는 사실까지 만들어낼 때다. 우연히 만났다는 설명이 감동의 이유라면 그 만남이 우연이었는지는 중요하다. 출연자의 선택을 응원하게 만들었다면 실제로 선택할 수 있었는지도 중요하다. 편집을 했느냐보다 무엇을 사실이라고 약속했느냐가 먼저다.
나는 이 논란을 보며 예능을 받아들이는 기준이 바뀌고 있다고 느낀다. ‘재미있으면 됐지’라는 말만으로 넘어가기 어려워졌다. 시청자는 이제 촬영 현장을 전혀 모르는 구경꾼이 아니다. 직접 영상을 찍고 편집하며, 같은 장면을 멈춰 보고 다른 영상과 비교할 수도 있다. 그만큼 자연스러운 순간과 자연스러워 보이도록 만든 순간의 차이에 민감하다. 제작진이 예상하지 못한 한마디, 계획이 틀어졌을 때 나오는 표정, 서로 눈치를 보다가 터지는 웃음에는 대본으로 정리하기 어려운 매력이 있다. 잘 차려진 장면보다 서툰 순간이 더 재미있을 때도 있다. 여행지에서 식당을 못 찾으면 못 찾은 대로 이야기가 된다. 모든 골목 끝에 기가 막힌 맛집과 감동적인 인연을 배치할 필요는 없다. 우리 여행에는 휴무일도 있고, 맛없는 점심도 있다.
그렇다고 카메라를 켜놓고 아무것도 하지 말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진짜를 보여주는 데도 기획과 솜씨가 필요하다. 평범한 하루에서 무엇을 발견할지, 서로 다른 사람을 어떤 상황에서 만나게 할지, 예상 밖의 일이 생겼을 때 어디까지 따라갈지 고민해야 한다. 상황을 준비하더라도 사람의 반응까지 정답에 맞추려 하지 않는 태도가 중요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가능성을 견뎌야 뜻밖의 일도 만날 수 있다. 처음부터 결론을 정해놓으면 출연자는 그 결론에 필요한 말을 하는 사람이 되고, 시청자는 정해진 감정을 느껴야 하는 사람이 된다. 어느 장면에서는 웃고, 어느 장면에서는 울라는 안내가 지나치면 예능을 보는 일도 숙제처럼 느껴진다. 웃음소리까지 친절하게 넣어줬는데 정작 나는 웃을 틈을 놓치는 것이다.
리얼리티라는 이름을 붙였다면 그 이름으로 얻는 이익과 책임을 함께 받아들여야 한다. 실제 일상이라기에 출연자에게 친근감을 느끼고, 진짜 도전이라기에 실패를 안타까워하며, 예상하지 못한 결과라기에 끝까지 지켜본다. 그렇게 쌓은 몰입을 문제가 생긴 뒤에야 ‘방송인데 왜 그러느냐’는 말로 정리할 수는 없다. 사실이라는 설명을 믿은 시청자에게 유난스럽다는 책임까지 돌려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의심스러운 장면 하나를 찾아 출연자의 인생 전체를 재판하는 것도 답은 아니다. 필요한 것은 어디까지 준비했고 무엇이 실제로 일어났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다. 준비한 여행도 재미있을 수 있고, 협조받은 촬영도 좋은 방송이 될 수 있다. 감춘 준비가 들통날까 전전긍긍하는 것보다 그 조건을 밝히고 당당하게 재미를 찾는 편이 낫다.
방송은 웃음과 감동을 만들지만, 그것이 시청자에게 닿게 하는 것은 신뢰다. 한번 의심하기 시작하면 다음에 나온 진짜 눈물까지 확인하게 된다. 재미를 조금 보태려다 앞으로 보여줄 장면의 설득력까지 잃을 수 있다는 뜻이다. 시청자가 원하는 ‘진짜 리얼’은 카메라와 편집이 사라진 방송이 아니다. 무엇을 준비했는지 숨기지 않고, 그 안에서 사람이 실제로 겪은 일을 보여주는 방송이다.
트렌드가 바뀌었다. 이제 자연스러워 보이는 기술만으로는 부족하다. 시청자는 대본에 없고, 제작진의 의도대로만 반응하지도 않는다. 어설프게 진짜인 척하다가는 이제 본전도 못 찾는다.
/개그맨 겸 방송인 황현희
[ⓒ 세계비즈앤스포츠월드 & sportsworldi.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