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양대군 없던 이유 "보이지 않는 악이 더 무서운 법"
결말이 정해진 역사는 창작자에게 거대한 벽과 같다. 모두가 아는 비극을 스크린에 옮기면서 관객에게 새로운 전율을 선사하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감독은 사료의 빈틈을 메울 정교한 상상력으로 관객을 설득해야 한다. 또 배우들의 연기력을 통해 그 가상의 이야기에 개연성을 부여해야만 한다. 익숙한 이야기를 낯설게 보게 만드는 힘, 그것이 사극 영화의 성패를 가르는 열쇠다.
충무로의 대표적인 이야기꾼 장항준 감독이 이 난도 높은 과제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그리고 개봉 50일만에 1500만 관객 돌파라는 대성공을 거뒀다.
30일 장 감독은 “믿기지 않는 일이다. 상상도 못한 일이다. 거대한 몰래 카메라 같은, 꿈같은 일이 생겼다”며 “손익분기점이 260만이었다. 과분한 사랑을 받았다”라고 기쁜 마음을 전했다.
◆첫 사극 도전, 김은희 작가의 ‘촉’이 결정적
평소 장 감독은 남들이 잘 하지 않는 분야에 도전하는 것을 즐기는 성격이다. 하지만 사극은 준비 과정이 복잡하고 고증 논란이나 제작비 부담이 커서 처음엔 선뜻 나서기 어려웠다. 그때 결정을 도와준 사람은 아내인 김은희 작가였다.
장 감독은 “처음 기획안을 받았을 땐 부담스러워 거절했다. 제작자에게 시나리오 초고 수정 방향을 조언했는데 ‘방향성이 너무 좋다. 무조건 감독님이 해야 한다’고 하더라. 일주일만 고민해보겠다고 한 뒤 초고를 들고 집에 왔는데, 아내가 하는 게 좋겠다고 하더라. 이후 스무 번 이상 시나리오를 수정했다”고 밝혔다.
장 감독은 “실현되지 못한 정의라고 해서 쉽게 잊혀도 되는가, 실패한 ‘의(義)’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어떠해야 하는가를 끊임없이 자문했다”고 돌아봤다. 이어 “성공한 불의에 박수를 보내는 세태 속에서, 비록 결과는 실패였을지라도 그 과정의 가치를 기억하고 추모하는 것이야말로 오늘날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태도라고 생각했다”라고 덧붙였다.
이러한 철학은 각색 방향을 정하는데 도움이 됐다. 역사적 기록이 단 몇 줄에 불과한 단종의 유배 생활은 감독의 상상력이 더해져 매혹적인 팩션으로 거듭났다. 장 감독은 “역사의 빈틈이야말로 창작자에게는 가장 큰 자극제”라며 “시나리오 수정 과정에서 단종 복위 계획을 축으로 한명회가 깊숙이 개입하고, 그가 민초인 엄흥도와 접촉하며 벌어지는 긴장감을 구체화했다”고 말했다.
◆수양대군이 없는 사극…“보이지 않는 악이 더 무서운 법”
왕과 사는 남자는 계유정난(1453년)이라는 익숙한 서사는 과감히 걷어내고 비극의 뼈대만을 남긴 모양새다. 숙부 수양대군에게 왕좌를 내어준 조선 6대 임금 단종의 생애 마지막 넉 달에 집중했다. 특히 주목할 지점은 단종을 폐위시킨 장본인인 수양대군이 극 중 단 한 장면도 등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장 감독은 이러한 파격적인 설정에 대해 “원래 진짜 악의 축은 전면에 드러나지 않을 때 그 공포가 극대화되는 법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장 감독은 “역사적으로도 수양대군은 전면에 나서기보다 이미지 정치를 중시했던 인물이라 봤다. 때문에 영화에서는 한명회가 그 역할을 충분히 대신할 수 있었다”며 “잠깐의 카메오 출연으로 관객의 몰입이 깨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한명회를 통해 수양대군의 거대한 영향력을 투영하는 것이 극적 긴장감을 유지하는 데 훨씬 효과적이라고 판단했다”고 덧붙였다.
◆‘0순위’ 유해진과 ‘삼고초려’ 박지훈
캐스팅 과정에서도 장 감독만의 확고한 기준이 돋보인다. 엄흥도는 실록에 적힌 ‘노산군이 돌아가셨을 때 엄흥도가 슬퍼하며 곡을 하고 시신을 수습했다. 그리고 숨어 살았다’라는 단 두 줄에서 출발한 캐릭터다. 역을 맡은 배우 유해진은 시나리오 집필 단계부터 염두에 둔 ‘0순위’ 캐스팅이었다. 장 감독은 “코미디와 정극을 자유자재로 오가며 관객을 웃기고 울릴 수 있는 배우는 대한민국에서 유해진뿐이다”라며 무한한 신뢰를 보냈다. 실제 유해진은 촬영 내내 대본을 손에서 놓지 않을 정도로 몰입했고 장 감독은 그런 그의 모습에서 “성공한 사람에게는 다 이유가 있다”는 점을 새삼 느꼈다고 전했다.
단종 역의 박지훈을 섭외하는 과정은 그야말로 삼고초려였다. 장 감독은 박지훈을 아이돌이 아닌 배우로서 눈여겨보고 있었으나 정작 박지훈은 네 번째 만남에서야 출연 확답을 줬다. 장 감독은 “사료를 보면 영특하고 학문적인 성취가 좋았고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고 하더라. 적통 중의 적통이다. 이런 것들을 보면서 지키고 싶은 소년왕이라고 생각했다”며 “박지훈은 20대라는 나이가 믿겨지지 않게 매우 침착하고 진중하다. 그가 아니었다면 이 정도로 깊이 있는 단종의 모습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라며 연기력을 높이 평가했다.
◆성공한 불의보다 실패의 가치
영화는 단종을 단순히 나약한 희생양으로 그리지 않았다. 역사적 기록을 바탕으로 영특하고 강단 있는 성군의 자질을 갖춘 인물로 묘사하며, 그런 왕을 지키려 했던 민초들의 마음을 담아냈다.
장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관객에게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는 무엇이냐는 질문에 “실현되지 못한 정의는 잊혀져야 하는가, 성공한 역모는 인정 받아야 하는가라는 개인적인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며 “성공한 불의에 박수치는 것이 아니라, 비록 실패했더라도 그 가치를 기억하는 태도가 중요하지 않을까”라고 강조했다.
장 감독은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9월에 열리는 제천국제음악영화제 준비로 바쁠 것 같다. 그리고 초심을 잃지 않기 위해 저예산 독립영화도 준비 중이다”라며 창작자로서 끊임없이 정진하겠다는 다짐을 전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한국 영화가 위기인데 극장에서 힘이 나온다. 앞으로 많은 영화에 관심 가져 주시면 이 문화가 앞으로도 후손까지 전해지지 않을까 싶다”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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