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진강 방어선에서 수비 병력의 태반을 말아먹은 한 응인은 되레 “장수들이 용렬하니 신묘한 계책도 무용지물이었습니다”라는 황당한 보고서를 올린다. 이들 중에서도 최악의 상황을 연출한 것은 도원수 김명원이란 작자였다.
임금이 떠난 한양을 지키기 위해 한강을 수비하던 도원수 김명원은 수만 명의 왜군이 한강 남쪽에 진을 치자 기가 질렸다. 어찌할까 고민하던 그는 부원수 신각의 항전 요청을 뿌리치고 작전상 후퇴를 결행한다. 그러나 신각은 그 명령을 어기고 한양 인근에서 유격전을 벌였다. 치고 빠지는 수법으로 왜군을 괴롭혔고 약탈을 위해 본대와 떨어진 왜군들은 어김없이 신각 부대의 칼에 피를 뿜었다. 이 용장 신각을 죽인 것은 왜군이 아니라 도원수 김명원의 장계였다. “신각은 부원수이면서도 도원수인 신의 명령을 듣지 않고 멋대로 양주로 도망쳤으니 이래가지고는 군율을 세우기 어렵겠습니다.”
명백한 허위 보고였고, 사태의 전말을 왜곡해 임금을 속인 것이었지만 상황판단도 안하고 노발대발한 선조는 사람을 보내 신각을 죽였다. 죽인 후 신각이 보낸 장계가 도착하자 다시 사람을 보내 사형을 막으려 했지만 이미 신각의 목은 떨어진 뒤였다.
도망밖에 모른 도원수가 싸우겠다고 나서고 실제로 공을 세운 군인을 죽인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있었다. 한강에서 도망가고 임진강에서 쫓겨나고 평양에서 무기와 쌀 다 버리고 줄행랑을 친 김명원은 달이 가고 해가 바뀌어도 여전히 도원수였다. 책임 따위는 없었다. 압록강가에서 천 리 가까이 강행군해 온 평안도 병사들이 하루만 쉬게 해 달라고 했다가 목을 자르는 가혹했던 군율은 도원수에게는 전혀 적용되지 않았던 것이다. 김명원은 좌의정까지 해 먹고 노후까지 잘 살다가 갔다. 이외에도 임진년 그 끔찍한 해에 조선의 정부와 군대가 벌인 매국노 짓은 한도 끝도 없었다.
일본놈들의 조총이 위력을 발휘한 탓도 있겠고, 전국 시대를 거친 왜적 놈들 군이 워낙 강병이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또 2백년 태평세월에 군비가 소홀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속절없이 조선이 무너져 내린 가장 큰 이유는 믿음(信)의 문제였다. 군대가 모자라서라기보다, 적이 강해서라기보다는 아래위로 서로 믿고 의지하는 자세가 실종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적군의 그림자만 비쳐도 도망 다니기 바쁜 지휘관을 어느 백성이, 어느 병사가 그 지휘관의 돌격 명령에 따를 것이며 천지신명이 도운들 그 군대가 승리할 수 있었겠는가. 숱한 부하들 목숨을 적에게 상납하고 제 일신의 안전을 위해 허위 보고를 서슴지 않는 군 수뇌부가 처벌은커녕 포상을 받는다면 그 군대를 군대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김상회 (사)한국역술인협회 중앙부회장 www.saju4000.com 02)533-88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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