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여곡절 늣깎이 데뷔

“저에게 있어 가수라는 것은 일종의 모태 신앙과 갔습니다.”
한국 최고의 작곡가 이봉조 선생과 50년 동안 꾸준히 현역생활을 이어온 가수 현미 사이에서 태어난 가수 고니(이영곤·46)에게 가수라는 직업은 운명이었을 지 모른다. 어린 시절 아버지 이봉조 선생의 집에는 온갖 악기들이 있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작곡하는 모습을 보며 자라온 고니는 피아노가 그렇게 치고 싶었다. 피아노 선율을 따라 작곡되는 음악의 탄생을 직접 본 고니가 피아노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극히 자연스런 일이었다.
“아버지께서 피아노 근처에 가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으셨어요. 환경은 좋았지만, 아버지는 완고하게 막으시더군요. 아마 아버지께서는 그 시대 부모들이 그러하듯이 제가 공부해서 남들과 같은 길을 가길 바라셨을 거에요. 가장의 완고한 반대에 부딪혀 결국 가수가 되고 싶다는 꿈은 입밖에 꺼낼 수도 없었습니다.”
이후 미국으로 유학을 간 고니는 남들처럼 대학을 졸업하고 결혼과 직장을 잡아 정신없는 삶을 살았다. 부동산컨설턴트로 어느 정도 삶이 자리가 잡힌 40대 중반의 나이에 고니는 어느 날 문득 피가 끓어오르는 게 느껴졌다고 한다.
“정신없이 살 때는 몰랐는데, 삶이 어느 정도 안정되니까 갑자기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해야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가수의 꿈이 문득 고개를 쳐든 거죠. 중년의 나이에 주위에서 미쳤다고 할지도 모르지만, 한번 꿈틀 되기 시작한 꿈을 도로 집어넣기는 힘들더군요.”

이미 미국에서 한인 라디오방송에서 DJ를 맡은 그는 직장과는 다른 적성을 거기에서 찾았다고 했다. 사람들의 사연을 들려주고 자신의 음악을 내보내면서 자신도 모르게 DNA속에 잠재된 부모의 피가 깨어난 것인지도 모른다. 어렵사리 가족의 동의를 얻어 들어간 한국. 하지만, 어머니 가수 현미는 그런 아들을 냉랭한 시선으로 쳐다볼 뿐이었다.
“14년 만에 짐 싸들고 어머니 집으로 갔어요. 느낌이 이상하셨는지 어머니는 ‘너 왜 그리 짐이 많으냐’셨죠. 처음에는 사업차 건너왔다고 했는데, 집요하게 물어오시니 더는 숨길 수가 없더군요. 그래서 ‘한국에 가수하러 왔습니다’라고 사실대로 고백했죠. 그러자 어머니 첫 말씀이 ‘그럼 나 가수 그만두면 되겠네’ 였어요. 어느 정도 반대는 예상했지만, 그렇게 말씀하시는데 순간 거대한 장벽이 제 앞에 있는 느낌이 들었죠.”
하지만, 어머니의 강력한 반대도 이미 단단히 마음먹은 고니의 결심을 꺾을 수가 없었다. 고니는 결국 평소에 호형호제하던 하광훈 작곡가를 만나 도움을 청했지만, 우선은 연습을 해보고 오디션을 봐서 통과해야 한다는 조건부 허락이었다. 하지만, 연습을 할수록 그의 독특한 중저음은 오래쌓인 먼지를 털어낸 명기처럼 빛을 발하게 됐고 나중에는 하광훈 작곡가가 오히려 한번 작업을 해보자고 손을 내밀정도로 인정을 받았다. 하지만 50년 가수 인생의 어머니 현미의 인정을 받기란 쉽지 않았다.
“지난해 진주에서 아버님을 기리는 이봉조 가요제가 열렸어요. 그날 제가 아들로서 참석을 했는데, PD께서 저한테 ‘아버님 행사인데 한곡 불러봐라’라고 불쑥 청하시더군요. 갑작스런 일이라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배포있게 무대에 섰습니다. 그때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보고 남진을 비롯한 선배가수들은 ‘실력있다’고 칭찬하셨어요. 그게 어머니 귀에 들어가서 결국 가수해도 된다는 암묵적 동의를 받았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나온 이번 첫 앨범 ‘첫사랑’. 앨범 제목은 가수 고니의 긴 외도끝에 다시 찾은 길이 가수란 걸 대변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이에 상관없이 자신의 꿈을 이루려다 지친 가장들에게 꿈을 심어주겠다는 가수 고니. 그의 마음은 꿈을 찾아 떠나는 20대 청년보다 더욱 푸르러 보였다.
글 황인성 기자, 사진 김용학 기자 enter@sportsworld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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