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음표가 어느새 느낌표로 바뀌고 있다. 방망이로는 중심 타선의 장타를 책임지고, 글러브를 끼면 외야 전 포지션을 오가며 벤치의 고민을 덜어준다. 바로 외야수 샘 힐리어드(KT) 얘기다.
힐리어드는 21일까지 70경기에 출전, 타율 0.288(274타수 79안타) 16홈런 54타점 OPS(출루율+장타율) 0.891을 써냈다. 홈런 부문 5위다. 외국인 타자 가운데서는 이 부문 선두 21홈런을 친 오스틴 딘(LG)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아치를 그렸다.
물론 숙제도 있다. 콘택트 비율은 68.9%로 규정타석을 채운 47명 가운데 46위다. 312타석서 삼진도 88차례(리그 1위) 당했다. 반대로 배트에 맞히기만 하면 장타와 강한 타구를 펑펑 쏟아낸다. 투수로선 한순간도 마음을 놓기 어렵다. 실투 하나면 빨랫줄 같은 타구가 외야를 가르거나, 담장 너머까지 뻗어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야구계에서는 시속 95마일(약 153㎞) 이상의 타구를 ‘하드히트’로 분류한다. 타구 속도가 빠를수록 수비가 대응하기 어렵고 장타나 안타로 이어질 가능성도 커진다. 공을 얼마나 정확하고 힘 있게 때렸는지를 보여주는 지표다.
야구 통계사이트 팬그래프스에 따르면 힐리어드가 작성 중인 이 하드히트 비율은 36.3%다. 홈런 상위 10명 가운데 최정(SSG·36.4%)에 이어 오스틴과 공동 2위다. 김도영(KIA·35.3%), 요나단 페라자(한화)와 르윈 디아즈(삼성·이상 33.8%), 강백호(한화·33.7%)보다 살짝 높다.
지난 20일 수원 KIA전서 나온 끝내기 안타가 이 위력을 잘 보여줬다. KT가 9회 말 5점 차를 뒤집은 상황(10-9)에서 힐리어드가 때린 타구는 투수 왼쪽을 지나 수비 시프트에 맞춰 선 유격수 쪽으로 향했다.
자칫 잡힐 법한 코스였지만 워낙 빠르게 뻗은 덕분에 내야를 빠져나가 외야로 흘렀고, 그대로 대역전극에 마침표를 찍었다. 제대로 맞힌 순간만큼은 리그에서 가장 위협적인 타자 중 하나라는 평가가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더 고무적인 대목은 KBO리그에 적응하면서 약점도 하나씩 지워가고 있다는 점이다. 시즌 초반 애를 먹었던 왼손 투수 공략에서도 해법을 찾았다.
시즌 전체 기록에는 여전히 초반 부진의 흔적이 남아 있지만 최근 흐름은 확연히 다르다. 3∼4월 좌완 상대 타율 0.135, OPS 0.519에 그쳤지만, 5월 이후 타율 0.306, OPS 0.860으로 껑충 뛰었다. 이 사이 좌완 상대 타석당 삼진 비율도 46.3%에서 25.9%로 크게 낮아졌다.
물론 약점을 지우는 과정이 늘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6월 이후론 그 짧은 시간 안에서도 천당과 지옥을 오가는 듯했다. 5일부터 13일까지 8경기 동안 타율 0.107(28타수 3안타) 14삼진에 그치며 깊은 슬럼프에 빠졌다.
실제로 선수가 느끼는 스트레스도 상당했다. 그러나 이강철 KT 감독을 비롯한 팀 내부의 두터운 신뢰 속에서 이 흔들림을 오래 끌지 않았다. 극심한 부진이 주는 압박을 이겨내고 다시 일어서는, 이른바 ‘회복탄력성’을 보여준 것. 16일 두산전부터 21일 KIA전까지 6경기서 타율 0.478(23타수 11안타) 3홈런 6타점을 몰아치며 빠르게 반등했다.
빅리그 7시즌 332경기, 마이너리그 10시즌 817경기를 치른 경험도 빠른 회복의 밑바탕이 됐을 터. 힐리어드는 “나도 이제 서른두 살”이라며 웃은 뒤 “이전에도 좋고 나쁜 흐름이 반복된 적은 많았다. 중요한 건 잘됐을 때의 감각을 오래 유지하고, 좋지 않은 시기는 최대한 짧게 줄이는 것이다. 계속해서 꾸준한 경기력을 보여드리려고 한다”고 말했다.
팀 차원의 효과도 크다. 매년 시즌 초반 더딘 출발로 ‘슬로우스타터’라는 꼬리표가 따라붙었던 KT는 올 시즌 전반기부터 순위표 상단을 달리고 있다. 부상 악재에 흔들리던 예년과는 다른 모습이다. 올해도 한때 부상자가 잇따랐지만, 상황에 맞춰 선수들을 유연하게 활용하며 공백을 메웠다. 이 과정에서 힐리어드의 존재감이 번뜩인다.
힐리어드 한 명이 라인업에 여러 장의 카드를 더해주는 효과를 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외야 세 자리를 모두 소화하면서 어느 위치에서도 안정적인 수비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벤치로서는 경기 중후반 대타와 대수비 투입은 물론, 수비 위치 변경까지 한층 자유롭게 가져갈 수 있다. 안현민과 최원준, 김민혁 등 다른 외야수들의 수비 부담을 덜고 적절히 휴식을 줄 여유도 생긴다.
외야 운용에 여유가 생기면서 지명타자 활용 폭도 자연스럽게 넓어졌다. KT는 올 시즌 김현수와 장성우, 김민혁, 이정훈, 안현민, 최원준 등을 번갈아 지명타자로 내세웠다. 힐리어드가 외야를 탄탄하게 지켜준 덕분에 주축 선수들의 체력을 관리하면서 타격감까지 살리는 다양한 조합이 가능해졌다.
힐리어드가 KT에 보태고 있는 것은 단순 홈런 16개를 넘어선, 그 이상의 가치다. 시즌 초 드러난 약점까지 지워가며 팀이 바라던 ‘만능’ 외국인 타자의 모습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중이다. 마법사들도 덩달아 한층 더 단단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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