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우에겐 언제나 ‘이미지 변신’이라는 숙제가 따라온다. 대중의 인식 속에 존재하는 이미지를 깨고 새로운 작품과 캐릭터를 만나 이채로운 변주를 그리고자 한다. 작품이 공개되는 플랫폼이 다양해지고, 작품의 공개 시기가 변화하면서 같은 배우가 여러 작품을 동시에 선보이게 되는 경우도 많다. 과거 동시에 여러 작품이 공개되는 배우들이 겹치기 출연으로 눈총을 받았다면, 이제 배우의 능력치를 대변하는 행보로 인식된다. 영화 속에선 화려한 액션으로 날아다니던 배우가 TV에선 눈물짓게 하는 세상. 대중의 보는 재미를 높이는 배우들의 열연이다.

◆박진영, 첫사랑도 빌런도 다 되네
최근 극과 극 캐릭터로 가장 화제가 되는 건 배우 박진영이다. 시청자의 호평 속에 주말극 강자로 떠오른 tvN 토일드라마 ‘미지의 서울’에는 첫사랑의 아이콘으로, 영화 ‘하이파이브’에서는 사이비 교주 영춘으로 분해 캐릭터를 완성했다.
‘미지의 서울’의 이호수(박진영)는 10년간 미지(박보영)를 기다려온 나무 같은 남자다. 차분하고 이성적인 듯하지만 누구보다 아픈 과거와 복잡한 내면을 지니고 있는 인물. 그런 그를 무장해제 시키는 건 미지뿐이다. 10년을 건너온 박보영과의 로맨스는 지극히 현실적이라 가끔은 고통스럽기까지 한 상황 속에서 숨 쉴 틈을 내어준다. 답답할 법도 하지만, 이호수의 느릿한 대사는 되레 흡인력을 높인다. 눈빛과 손끝, 미세한 움직임까지 이호수를 보고 있자면 인물의 감정을 전달하는 방법에 대사만 있는 게 아니란 걸 알게 된다.
‘미지의 서울’에서는 시청자의 설렘을 자극하지만 ‘하이파이브’에서는 광기 그 자체다. 박진영은 췌장 이식 후 젊어진 사이비 교주 영춘으로 첫 악역에 도전했다. 대선배 신구를 빼다 박은 말투에 젊어진 쾌남 설정조차 전혀 어색함이 없다. 섬뜩한 광기, 후반부 욕망을 향해 폭주하는 활극 액션까지 매력적인 빌런으로 ‘하이파이브’의 한 축을 채운다. 그간 보여준 부드러운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미지의 서울’ 이호수를 두고도 전혀 상상할 수 없는 변신이다.

◆오정세·이재인, ‘하이파이브’ 유쾌한 부녀의 변신
배우 이재인 ‘하이파이브’에서 심장을 이식받은 후 괴력과 기동력을 얻은 태권소녀 완서로 분했다. 환자로서의 설움과 아버지를 향한 애틋함, 새롭게 사귄 초능력 친구들과의 우정까지 감정 변화의 폭도 넓다. 무엇보다 생애 첫 액션에 도전해 고난도 와이어 액션을 완벽하게 소화해 호평받고 있다. 빠른 스피드와 완성해낸 카트 체이싱 신은 ‘하이파이브’의 명장면으로 꼽힌다. 막내이자 팀의 주축으로 활약하며 베테랑 선배들과의 호흡에도 모자란 기색이 없다.

발차기 하나로 여럿을 쓰러트리던 이재인이 ‘미지의 서울’에선 첫사랑의 추억을 간직한 소녀로 분한다. 이재인은 쌍둥이 유미지, 유미래 역 박보영의 어린 시절을 연기한다. 1인 2역 탓에 극 안에서도 변신의 연속이다. 성격도 취향도, 공부 머리까지 닮은 구석이 없는 두 사람을 연기하기 위해 표정, 목소리, 눈빛조차 달라진다. 성인역 박보영을 향한 극찬 뒤에는 과거 회상신을 이질감 없이 채워주는 이재인의 열연도 한몫한다. ‘하이파이브’에서 초능력 결투를 벌였던 박진영과는 한 작품에서 서로 다른 시간을 연기하고 있다는 점도 눈길을 끈다.

‘하이파이브’ 주연진 중 유일하게 초능력이 없는 종민 역의 오정세도 두 작품에서 180도 다른 캐릭터를 선보이고 있다. 초능력이 없지만 어찌 보면 초능력보다 센 ‘아빠의 힘’으로 딸을 지킨다. 완서에게 초능력이 있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른 채 딸을 지키기 위해 몸을 던지는 오정세는 짠하면서 유쾌한 코믹 코드로 극의 긴장감을 조율한다.
반면 JTBC 드라마 ‘굿보이’에서는 스크린 속 딸 바보 아빠의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관세청 공무원 민주영 역의 오정세는 차량 밀수부터 마약에 이르기까지 악행을 서슴지 않는 빌런이다. 겉으로 보면 평범한 공무원 같지만 건조한 눈빛 뒤에는 소시오패스 같은 내면이 자리하고 있다. 특유의 무표정과 서늘한 어조가 오히려 섬뜩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정체가 들통나자 폭주하기 시작한다. 변신이라는 단어도 무색할 지경. 소처럼 열일하는 오정세는 매 작품 그가 아닌 배우를 떠올릴 수 없게 한다.
◆‘광장’의 금쪽이 추영우·공명, 극과 극 얼굴
대세 배우로 급부상한 추영우의 활약상도 눈부시다. 올해 초 사극 로맨스 ‘옥씨 부인전’에서 사랑꾼 면모를 보여줬다면, 의학드라마 ‘중증외상센터’에서는 코믹과 성장을 동시에 그리며 시청자의 마음에 안착했다. 지난 6일 공개된 넷플릭스 시리즈 ‘광장’에서는 본 적 없는 얼굴로 반전을 안겼다. 느와르 액션물 ‘광장’에서 추영우는 광장 세계를 양분하고 있는 조직의 2세이자 현직 검사 이금손 역을 맡았다. 판도를 뒤엎을 야심을 품고 예측 불가한 전개를 이끄는 최종 빌런으로 활약했다.

장르물이면 장르물, 시대극이면 시대극 어디 하나 모자람 없이 극에 녹아들었던 추영우가 다시 교복을 입는다. 23일 첫 방송 되는 tvN 새 월화드라마 ‘견우와 선녀’는 죽을 운명을 가진 소년과 이를 막으려는 MZ 무당 소녀가 벌이는 열여덟 청춘의 첫사랑 구원 로맨스. 추영우는 첫사랑을 위해 운명과 맞서는 고등학생 무당 박성아(조이현)로 인해 운명을 역행하는 배견우 역을 맡아 풋풋한 학원물을 써내려간다.

‘광장’의 또 다른 빌런 준모 역을 맡은 공명의 변신은 그 누구보다 파격적이다. 악역도 느와르 액션도 처음이었다는 공명은 기대 이상의 열연으로 반전을 안겼다. 그간 방긋 웃는 미소로 순수한 캐릭터를 연기해왔다면 이번엔 비열하고 치졸하기까지 한 인간의 민낯을 보여준다. 아버지의 힘을 믿고 활개 치면서도 아버지의 그늘에 가려 피해의식을 가지고 있다. 돈이면 다 되는 줄 알고 싸움을 붙이지만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등장부터 퇴장까지 충격의 연속이다.

최근 종영한 tvN 드라마’금주를 부탁해’에서는 다시 우리가 알고 있던 스윗한 공명으로 돌아와 로맨스를 그렸다. 극 중 금주(최수영)의 금주를 돕는 의자이자 동창 서의준으로 분한 공명은 첫사랑 금주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설렘 가득한 러브라인을 완성했다. 듬직한 의준이었다가 금쪽이 준모였다가 TV와 OTT를 넘나들며 활약했다. 올 상반기, 폭넓은 스펙트럼을 증명한 배우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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