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 브로드웨이로 진출한 한국 창작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이 8일(현지시간) 열린 제78회 토니상 시상식에서 뮤지컬 부문 작품상을 비롯 연출상과 극본상, 음악상 등 6개 부문을 석권 했다. 토니상은 쉽게 ‘미국 공연계의 아카데미상’이라 볼 만하다. 해당 분야에서 가장 유명한 상이란 점도 같지만, 가장 대중 취향의 상이란 속성도 비슷하다. 결국 토니상 역시 아카데미 상처럼 그 대중 취향 안배를 위해 해당 공연의 흥행 성공 여부를 보는 부분도 있단 얘기. 이 정도로 상을 휩쓴 공연이라면 이미 흥행 성공작이기도 하단 얘기가 된다.
실제로 그렇다. ‘어쩌면 해피엔딩’의 브로드웨이 진출 신화는 곧 아슬아슬한 흥행 성공 신화이 기도 했다. 지난해 10월 프리뷰 공연이 시작된 후 한동안 주간 총수입이 주당 운영비 76만 5000달러 절반에도 못 미치는 30만 달러 수준으로 저조한 성적을 거뒀지만, 점차 입소문을 타 크리스마스 연휴 처음 주간 수익 100만 달러를 넘긴 뒤 계속 승승장구 중이다. 이렇듯 미 국 대중 소비자들에 먼저 인정받은 뒤 그 탄력으로 주어진 상이란 점에 더 의미가 깊다.
어찌됐든 대중음악과 영화, TV드라마 등에 이어 이제 뮤지컬까지 난공불락처럼 여겨지던 미 국시장 진출에 성공하는 광경은 문화산업 전반에 적용되는 한 가지 원칙을 새삼 일깨워준다. ‘냄비론’, 즉 어느 분야든 자국시장이란 냄비 안에서 끓다 못해 냄비 밖으로 넘쳐흐르는 상태 가 곧 해외진출 본질이란 것이다. 일단 해당 분야 내수시장이 과열 수준으로 달아올라야 치열 한 경쟁 속에서 퀄리티와 각종 방법론들이 발전해 해외서도 먹힐 수준으로 거듭난단 얘기.
국내 뮤지컬계는 지난 사반세기 동안 정확히 그런 경로를 밟아왔다. 2000년 불과 140억 원대 에 불과했던 국내 뮤지컬시장 규모는 2001년 ‘‘오페라의 유령’ 쇼크’ 이후 가파른 성장세를 보인 뒤 ‘영웅’ ‘웃는 남자’ 등을 필두로 창작 뮤지컬 붐을 유도하면서 결국 2022년 사상 최 초로 시장 규모 4000억 원대를 돌파하는 쾌거를 거둔다. 지난해 시장 규모는 약 4652억 원 대. 사반세기 동안 30배가 넘는 시장 성장을 일궈낸 셈이다. 그렇게 한국은 미국, 영국, 일본 등에 이어 세계 4대 뮤지컬시장으로 자리매김하게 됐다.
돌이켜보면 TV드라마도, 대중음악도. 영화도 같은 경로를 거쳤다. 1990년대 후반 ‘한류’란 용 어를 만들어낸 TV드라마 분야는 1990년대 초중반 극적 상승세를 겪었다. 지금도 역대 시청률 순위 10위권 내 들어가는 MBC ‘사랑이 뭐길래’(64.9%), SBS ‘모래시계’(64.5%), MBC ‘여명 의 눈동자’(58.4%) 등이 이 시기 등장했다. 1992년 MBC ‘질투’ 기점으로 트렌디드라마 등 새 로운 장르들도 속속 개발됐다. 그렇게 분위기가 이어지니 시장이 확대되며 경쟁도 치열해지고 전반적 퀄리티와 방법론들도 속속 개발돼 해외까지 뻗어나갈 역량을 갖추게 됐다는 것.
영화 역시 ‘한국영화산업은 ‘쉬리’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막대한 영향 을 끼친 1999년 ‘‘쉬리’ 쇼크’ 이후 급격한 성장세를 보였고, 2007년 드디어 한국영화 시장점 유율 50%를 돌파하는 기염을 토한다. 대중음악도 1990년대 후반 SM엔터테인먼트를 시작으로 처음 체계적 산업화 단계를 밟으며 고도성장, 주로 아이돌상품을 통해 지속적 발전을 이뤘다. 결국 해외진출에 성공한 첫 상품도 그 산업 성장의 중심인 아이돌이 됐다.
이는 다른 식으로 말하자면, 결국 산업을 성장시키고 콘텐츠 질적 상승을 가져오는 것은 내수 대중 소비자들의 열정과 열기란 것이다. 안에서 끓지 않으면 결코 냄비 바깥으로 흘러넘칠 수 없다. 국가 주도로 특정 분야를 키워낸다는 발상 등이 허랑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대중 소 비자들 관심을 끌어올 방법들을 고민해보는 것 외에 다른 왕도는 존재하지 않는다. 사반세기 동안 30배 이상으로 키워내 브로드웨이까지 도달한 뮤지컬계도 그 산 증인 중 하나다.
한편, ‘어쩌면 해피엔딩’ 성과는 또 다른 산업적 가능성도 생각해보게끔 한다. 한국 뮤지컬영 화의 가능성 부분이다. 최근까지만 해도 “한국영화에서 SF/판타지보다도 부실한 장르가 뮤지컬” 소리까지 듣던 현실이다. 물론 한국 대중도 뮤지컬영화를 즐긴다. 1960년대 ‘웨스트 사이 드 스토리’ ‘사운드 오브 뮤직’ 시절부터 형식 자체에 거부감을 느껴오진 않았다. 그러나 해당 형식이 ‘한국’ 배경으로 ‘한국인’들에 적용되기 시작하면 거북함을 느껴왔다는 게 사실이다.
한국영화의 지고한 리얼리즘 전통 탓이다. 그 탓에 SF/판타지 등 소위 ‘비현실적’ 장르들 도 착이 늦었던 셈이고, 그나마 SF/판타지 등은 그 배경과 설정만 비현실적일 뿐 나머진 리얼리 즘적으로 재편해 21세기 들어 먹히기 시작했지만, 애초 인물들 간 커뮤니케이션과 감정 묘사 자체가 비현실적으로 양식화된 뮤지컬 장르는 한국 대중이 ‘한국영화’에 기대하는 공감과 밀 착감의 틀엔 적합하지 않았단 것.
그런데 또 다른 지점을 지적해볼 필요도 있다. 2006년 ‘구미호 가족’과 ‘삼거리 극장’으로 시 작된 한국 뮤지컬영화 실험들은 대부분 ‘오리지널 뮤지컬영화’, 즉 원작이 되는 공연뮤지컬이 존재하지 않는 영화들이었단 점이다. 물론 뮤지컬영화 본 고장 미국선 이런 오리지널 뮤지컬 영화들도 인기를 얻는다. ‘사랑은 비를 타고’부터 ‘라라랜드’에 이르기까지 성공작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이들 역시 ‘광란의 1920년대’ 동안 브로드웨이가 급성장하고 그 덕에 1940년대 ‘성조기의 행진’ ‘세인트루이스에서 만나요’ ‘춤추는 대뉴욕’ 등 브로드웨이 뮤지컬 기반 영화 들이 시장을 탄탄하게 다져놓은 뒤 등장한 시도들이었고, 지금도 여전히 미국 뮤지컬영화 중 심은 ‘시카고’ ‘레미제라블’ 등 브로드웨이 뮤지컬 기반이란 점을 고려해둘 필요가 있다.
결국 자국 창작뮤지컬 시장의 부흥 없이는 자국 뮤지컬영화 부흥도 없는 셈이다. 그리고 지금 은 ‘이제야’ 드디어 자국 뮤지컬영화 부흥을 꾀해볼 시점에 이르렀다 봐야 하고, 그 영화화 성 공의 기반은 성공한 창작뮤지컬들이 다져줘야 한다는 분수령도 함께 알려준다. 한국서 최초로 300만 관객을 넘어서며 처음 한국 뮤지컬영화의 상업적 가능성을 알린 2022년 작 ‘영웅’이 2009년 초연을 시작해 누적 100만 관객을 끌어모은 창작뮤지컬 영화화란 점을 인지해둬야 한 다. 그렇게 성장 동력이 둔화되다 못해 하강 중인 한국영화계에 새 동력이 돼줄 장르 개발 단 초는 ‘어쩌면 해피엔딩’의 역사적 성과가 제공해주고 있다고도 볼 수 있겠다.
/이문원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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