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8년 한 방송사의 연말 음악 시상식. 아이돌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무대에 흥겨운 리듬의 ‘아모르파티’가 울려 퍼졌다. 김연자의 화려한 의상, 현란한 퍼포먼스는 연말 시상식에 제격이었고 후배들은 한 데 모여 어깨춤을 췄다. ‘방탄소년단이 백댄서가 된 무대’로 두고두고 회자한 이 무대로 트로트의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후 각종 경연 프로그램의 흥행으로 트로트는 대중음악의 한 장르로 당당히 자리를 잡았다.
시간이 흘렀고 트로트는 이제 서브가 아닌 중심문화로 굳게 뿌리내렸다. 경연 프로그램에서 젊은 스타가 탄생하며 인기를 부활시켰다. 그런데 왕년의 스타들은 하나둘 무대를 떠나고 있다. 나훈아는 지난 1월 은퇴 공연을 마무리했고, 이미자는 4월 마지막 무대를 앞두고 있다. 현철, 송대관은 세상을 떠났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젊은 가수들과 자연스럽게 세대교체가 일어나고 있는 상황이다. 다만 이런 흐름조차 5년 가까이 이어지며 업계는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 당시 새로 탄생한 스타들도 어느새 익숙한 이들이 됐다. 무언가 새로운 활력소가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다행히 선후배들의 공존과 상생의 문화가 형성되고 있다. 당대 최고의 히트곡들로 경연하는 음악 프로그램이 많아지면서 노래는 물론 원곡자도 재조명된다. 잊힌 명곡을 리메이크하는 후배들도 많아졌다. 국내 최고 보컬리스트 김범수는 1990년 발매된 나훈아의 ‘영영’을, FT아일랜드 이홍기는 김연자의 아모르파티, 트로트 소녀 김다현은 윤수일의 ‘아파트’를 자신만의 색깔로 재해석해 발표했다. 세대를 초월한 컬래버레이션 무대와 신곡 발표 등으로 트로트가 다시 큰 숨을 내쉬고 있다.

◆‘시대의 흐름’ 담아…트로트의 역사
트로트 탄생 기원 중 가장 유력한 의견은 1910년대 미국에서 유행한 춤곡 폭스-트롯(fox-trot)에서 파생됐다는 설이다. 폭스트롯이 일본으로 넘어가 ‘도로토’가 됐고, 일본 정서가 묻어난 ‘엔카’가 탄생했다. 7음계 중 ‘레’와 ‘솔’을 뺀 독특한 단조 5음계(라시도미파)를 특징으로 하는 엔카가 번역·번안을 거쳐 1930년 전후로 국내에 들어왔다. 이후 우리 가수들이 밝은 풍의 장조 노래들을 선보이며 비로소 트로트가 확립됐다.
남진, 나훈아로 시작해 송대관과 현철, 태진아, 설운도까지 당대 최고의 스타들이 트로트 부흥기를 이끌었다. 일제강점기의 왜색이 남아있어 비판받고 서양 음악의 등장으로 위기를 겪기도 했지만, 우리만의 정체성을 확립시키며 지금에 이르렀다.
이미자는 단순히 트로트가 아닌 전통가요, 혹은 정통 트로트로 불러주길 바랐다. 그는 “전통가요는 일제강점기를 버티며 겪은 설움, 해방이 기쁨도 찾기 전에 벌어진 6.25 등 연속된 고난을 버틸 수 있게 한 힘이었다. 우리 시대의 흐름을 대변해 주는 노래”라고 정의했다.

◆후배들이 다시 일으킨 전성시대와 위기
트로트는 2020년 이후 젊은 가수들의 활약으로 전 세대를 아우르는 전성시대를 맞이했다. 송가인, 임영웅을 시작으로 이찬원, 영탁, 손태진, 안성훈 등 새로운 스타들이 대거 탄생했다. 과거엔 그저 부모님이 듣던 장르였다면, 이제 남녀노소 즐길 수 있는 장르로 거듭났다. 향유하는 문화에도 변화가 생겼다. 티켓팅 문화에 낯선 부모를 위해 자식들이 예매에 나섰고, 공연장에 가면 가족 단위의 관객도 흔하다. 아이돌 팬덤의 문화가 트로트 팬덤에도 확장돼 ‘내 가수’를 위한 음원 스트리밍 방법을 익히고 의상을 맞춰 입고 응원봉을 흔든다.
시대를 풍미했던 선배 가수들 역시 N번째 전성기를 되찾았다. 방송계와 공연계는 앞다퉈 추억의 가수들을 소환하기에 이르렀다. 공연형 가수들도 톡톡히 덕을 봤다. ‘트로트 황제’ 나훈아는 뜨거운 열기 속에서 은퇴 공연 ‘고마웠습니다-라스트 콘서트’를 마무리했다. 올해로 데뷔 60주년을 맞은 남진과 40주년을 맞은 주현미는 각각 전국투어를 전개한다. 남진은 “힘겨운 삶을 살아온 어르신들에게는 감사의 마음을, 새로운 세대에게 트로트의 진한 감동을 전하고 싶다”고 바랐다.
위기의 시선도 존재한다. 대표적인 부분이 주 팬덤의 고령화다. 젊은 세대까지 트로트 열풍에 합류한 것은 사실이지만 실제로 지갑을 열며 소비하는 이들은 여전히 중장년층이다. 소비 여력이 있는 새 팬덤의 수혈이 원활히 이루어지지 못했다. 사랑, 이별, 고향 등 트로트의 일반적인 주제로는 젊은 세대의 지갑을 열기는 어려웠다. 또 지난 5년간 신인 가수들의 대거 발굴로 경쟁 요소가 심해졌고, 최근에는 불안정한 정국과 잇단 사고로 축제마저 줄어들어 A급 스타가 아니면 생활이 녹록지 않다는게 업계 관계자의 설명이다.

◆세대교체와 신구조화…선후배 ‘트로트 하모니’
전성시대 후 주춤한 현실에서 다시 불씨가 살아나는 기미가 보인다. 젊은 세대들이 정통 트로트뿐 아니라 트로트의 하위 장르를 만들어 자신만의 영역을 개척하고 있는 것이다. 댄스, 알앤비, 록, 포크, 세미 트로트 등 다양한 변주를 만들어 가고 있다.
선후배 간의 의미 있는 협업도 반갑다. 신인 시절부터 정통 트로트를 고집해 온 데뷔 13년 차 가수 송가인은 장점을 드러낼 수 있는 장르로 단연 정통 트로트를 꼽는다. 그런 그가 대선배 심수봉과 트로트로 호흡했다. 지난달 발매한 신곡 ‘눈물이 난다’는 선배 심수봉이 작사·작곡에 참여한 곡이다. 심수봉은 일대일 레슨과 코러스까지 전적으로 지원사격을 해줬다.
이미자는 지난해 ‘미스트롯3’ 결승전에 출연해 스페셜 무대를 꾸몄다. 트로트 부흥을 이끈 후배들을 향한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직접 무대에 나섰다는 후문이다. ‘유달산아 말해다오’, ‘갈매기가 되어’를 열창한 이미자는 미래를 이끌어갈 후배들에게 “트로트는 타 장르보다 음의 폭이 깊고 넓다. 트로트를 완벽하게 부를 수 있는 사람은 다른 노래도 다 부를 수 있다는 걸 꼭 알려주고 싶었다”고 조언했다.
정가영 기자 jgy9322@sportsworld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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