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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원의 쇼비즈워치] 과거에서 온 ‘볼테스 V’

입력 : 2023-05-18 13:51:47 수정 : 2023-05-18 13:5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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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리핀 대중문화계에서 흥미로운 소식이 전해졌다. 필리핀 방송채널 GMA에서 지난 8일부터 방영되고 있는 TV드라마 ‘볼테스 V 레거시’ 얘기다. ‘볼테스 V 레거시’는 1977~1978년 일본 아사히TV에서 방영한 애니메이션 ‘초전자머신 볼테스 V’(이하 ‘볼테스 V’)가 원작이다. 필리핀 방송사에서 실사 드라마화 판권을 일본서 사들여 제작한 콘텐트. 그리고 방영 즉시 대단한 반향을 일으켰다. 1화부터 시청률 14.6%로 일간시청률 1위를 차지했다.

 

 궁금증이 생길 수밖에 없다. 어째서 ‘철지난’ 1970년대 일본 거대로봇 애니메이션의 실사 드라마가 필리핀서 이처럼 열띤 반응을 일으키는 걸까. 아니 애초 필리핀에선 왜 ‘볼테스 V’ 판권까지 사와 필리핀으로선 거대 제작비를 들여 80화 분량 TV시리즈를 만들었을까 말이다. 답은 단순하다. ‘볼테스 V’는 1978년 필리핀 방영 당시 ‘그냥 애니메이션’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일종의 문화 현상이었고, 곧 시대를 대변하는 클래식 중 하나로 자리매김했다.

 

 일단 당시 최고시청률 58%를 기록하며 대단한 문화현상을 일으켰다. 그런데 더 중요한 건 그 다음부터다.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정권의 계엄령 하에서 종영까지 불과 4화분만을 남겨둔 채 방영금지 조치가 내려진 것. 시청률 58%짜리 프로그램이 정부 방침으로 갑자기 끊기고 결말을 보지 못하게 됐으니 필리핀 대중에 강한 인상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그렇게 마르코스 정권의 사회문화적 억압 자체를 상징하는 콘텐트로 자리 잡게 됐고, 그 탓에 1986년 마르코스 정권이 실각하자마자 ‘급한 불’처럼 곧바로 재방영이 이뤄졌다. 심지어 1999년 다시 방영됐을 때도 40% 시청률을 기록할 정도 대단한 호응을 얻었다. 그런 독특한 위상이 ‘볼테스 V 레거시’ 제작과 공개 즉시 시청률 1위로 다시금 입증되고 있는 셈이다.

 

 그럼 마르코스 정권에선 왜 ‘볼테스 V’에 방영금지 조치를 내렸던 걸까. 일각에선 프랑스혁명을 연상시키는 설정에 독재정권이 민감히 반응한 탓이라고도 하지만, 그렇게 멀리 갈 것도 못된다. 오히려 칼을 휘두르는 거대로봇 설정이 일본 사무라이를 연상시킨다며 왜색(倭色) 논란이 일었던 점이 더 주요했단 견해다. 필리핀 역시 1942~45년 일본에 점령당해 각종 학살 등을 겪은 나라고, 그 탓에 1970년대만 해도 반일감정이 상당했었다. 그리고 마르코스는 반일투사 이미지를 내세우며 정적들을 친일로 몰아 공격함으로써 대중적 인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그러니 ‘볼테스 V’ 왜색 논란을 잠자코 내버려둘 리 없었단 것이다.

 

 그럼 반대로, 필리핀 대중은 어째서 왜색 논란까지 일었던 ‘볼테스 V’에 그토록 열광했던 걸까. 여기선 위 ‘프랑스혁명을 연상시키는 설정’이 계엄령 체제 하에서 역할 했을지 모르지만, 이 역시도 그리 멀리 갈 필요 없을지 모른다. 당시 필리핀의 사회문화 검열과 통제는 어마어마한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네온 불빛 속의 마닐라’로 잘 알려진 세계적 영화감독 리노 브로카조차 필리핀 밑바닥 삶을 묘사한 1976년 작 ‘인시앙’이 “아름다운 필리핀을 보여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검열 삭제당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이런 분위기니 ‘아이들 보는 애니메이션’이기에 별다른 감시를 받지 않아 상대적으로 이런저런 묘사가 자유로웠던 ‘볼테스 V’에서 엔터테인먼트 본연의 즐거움을 찾았단 주장이 더 설득력 있다.

 

 이제 한국을 돌아보자. 한국도 마찬가지로 툭 불거져 나온 문화현상들엔 그 시대 특징적 공기에 대한 설명과 해석이 필요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볼테스 V 레거시’처럼 ‘과거로부터 다시 돌아온 문화현상’ 접근은 상당부분 편의적이고 단순화되기 일쑤다. 당장 맞닥뜨린 현상들엔 다소 과도한 해석들까지도 줄기차게 이어지지만, 과거 현상들은 대개 천편일률적으로 취급되곤 한다. 가까운 예로 ‘더 퍼스트 슬램덩크’ 흥행 돌풍 상황을 들 수 있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애초 원작만화에 강한 노스탤지어를 지닌 3040 남성층이 몰려들어 초반 흥행몰이가 시작됐고, 거기서부터 관객층이 확대돼 465만 관객을 동원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런데 애초 원작만화 ‘슬램덩크’는 왜 그토록 3040세대에 강한 애착을 불러일으킨 걸까 말이다. 물론 1990년대 당시의 ‘슬램덩크’ 인기배경에 대해선 간략하게나마 종종 언급은 된다. 마이클 조던을 선봉장 삼은 미국 NBA 농구의 세계적 인기와 맞물려 시너지가 일어난 성공이었단 것. 거기서부터 국내 대학농구 붐으로 이어지고, 다시 MBC 드라마 ‘마지막 승부’ 등 대중문화 콘텐트 인기로 서로 영향을 주고받던 흐름이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당시 현상적 인기를 누리던 만화는 ‘슬램덩크’만이 아니었다. ‘드래곤볼’도, ‘시티헌터’도 있었다. 그밖에도 많다. 그런데 왜 3040세대는 다른 1990년대 인기 만화들 극장판 애니메이션엔 시큰둥하다 유독 ‘슬램덩크’에만 거세게 반응했느냐는 것이다.

 

 결국 X세대라 불리던 1990년대 한국청춘들에 ‘슬램덩크’는 그들 정체성과 연결되는 특별한 세대증명 의미가 있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이에 혹자는 1990년대 당시도 제시됐던 이현세 만화 단골주인공 오혜성과 ‘슬램덩크’ 강백호의 비교 논리를 거론하기도 한다.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선 주변 환경부터 모조리 바꿔나가야 한다는 유물론적 오혜성 월드와 먼저 자신이 바뀌어야 자연스럽게 자기 주변도 하나둘 바뀌어간다는 유심론적 강백호 월드의 비교 말이다. 결국 강백호가 보여주던 세계관이 당시 젊은 층에서 동의를 얻어가던 시절이었단 것.

 

 한편, 영화, TV드라마, 만화 등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국내 대중문화 콘텐츠가 계급갈등 테마에 천착하고 사회의 시선도 그리로 집중돼있던 때, 계급갈등 요소는커녕 주인공들이 어떤 사회계층에 속해있는지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는 ‘슬랭덩크’ 세계가 막 중산층 신화를 쓰던 당시 청춘들에 자신들의 세상 인식을 대변해줬단 의견도 존재한다. 또 격동의 1980년대가 끝나고 청년세대 탈(脫)이데올로기화가 한창 진행되던 시절, ‘그럼 이제 청년은 무엇을 위해 살아야하는가’란 테마를 진취적 시각에서 풀어내줬단 주장도 많다.

 

 많은 점에서 바로 ‘이런 게’ 지난 ‘더 퍼스트 슬램덩크’ 열풍에서 한 번쯤은 거론됐어야 할 부분일 테다. ‘볼테스 V’가 당대 필리핀 대중에 어떤 의미였는지에 대한 시대사적 논의와 마찬가지로 ‘슬램덩크’에 대해서도 더 깊은 논의들이 필요했다. 그런 논의들이야말로 지금의 대중문화 흐름에 대한 이해는 물론 미래 대중문화 전망까지도 마련해준단 점에서 특히 그렇다. 과거로부터 돌아온 ‘볼테스 V’ 필리핀 드라마판 인기가 일러주는 중요한 지점이다.

 

/이문원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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