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형에 치이고 동생에 밀린 설움을 대놓고 표현할 수도 없었다. 미운 짓을 해도 마냥 미워할 수 없는 캐릭터였다. 시청자에게도 애증의 캐릭터가 되어버린 순양가의 차남. 배우 조한철이 연기한 진동기는 ‘재벌집 막내아들’의 빼놓을 수 없는 관전 포인트였다.
지난달 25일 종영한 JTBC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이하 ‘재벌집’)은 재벌 총수 일가의 오너리스크를 관리하는 비서 윤현우(송중기)가 재벌가의 막내아들 진도준(송중기)으로 회귀해 인생 2회차를 사는 판타지 회귀물. 198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격변의 시대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치밀한 미스터리와 음모, 상상을 초월하는 승계 싸움이 휘몰아쳤다.
23일 종영 인터뷰를 위해 조한철을 만났다. ‘재벌집’의 흥행에 조한철은 “이럴 줄은 몰랐다. 행복하다”며 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배우들조차 놀라 연락을 주고받았다고. “이렇게 잘 되니 지금 촬영하고 있으면 다 같이 행복했겠다는 생각이 든다. 보고 싶다”고 동료 배우들과 작품을 향한 애정을 숨기지 않았다.
일찌감치 촬영을 마친 ‘재벌집’에 조한철 역시 시청자 모드로 드라마를 감상했다. 연기할 때는 미처 알아보지 못한 모습이 보이기도 하고, 동료 배우들의 열연이 흥미롭게 다가오기도 했다. 특히 김신록, 김도현이 연기한 화영-창제 부부의 능청스러운 호흡에 웃음이 터졌다.

시청률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갔다. 조한철은 “시청률은 언제나 그렇든 시청자의 몫이라 생각했다. 다만 촬영할 때부터 ‘완성도 있는 좋은 드라마가 되겠구나’ 싶었다”고 답했다. “시청률을 염두에 두면 스트레스를 받는다”면서도 “(‘재벌집’ 시청률은) 내가 겪어 보지 못한 수치더라. 추이가 난리가 났다”고 했다. 또 “다른 촬영장에서도 자꾸 ‘재벌집’ 이야기를 하니까 민망하다”고 말하며 새어 나오는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처음 대본을 읽고 쾌감을 느꼈다. “와이프와 회귀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눴다. 그런데 그런 대본이 나온 것”이라며 “누구나 한 번쯤 생각해보지 않나. 기억을 가지고 돌아가서 살아가는 전개. 늘 하는 이야기가 ‘로또 번호를 가지고 간다’다. 상식이 많아야 한다. 주식의 동태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했었다”고 했다.
평소 상상했던 회귀물의 주인공으로 어떤 삶을 살아보고 싶을지 물었다. 그러자 “가수”라는 의외의 답변이 돌아왔다.
“다시 태어나면 배우도 좋지만 가수의 감정을 느껴보고 싶어요. 배우들은 촬영하면 스태프도 조용 연기를 지켜본다. 그런데 가수의 경우 관객은 미칠 것 같은 호흡을 내뱉고 가수는 그걸 그대로 느끼잖아요. 뮤지컬 커튼콜에서 잠깐 느껴봤었던 감정이에요. 연극은 매번 관객을 감동 시킬 수 없는데, 음악은 힘이 있는 것 같아요. 짧은 멜로디로 분위기를 바꿀 수 있는 위대한 힘 말이죠.”
진동기는 순양가 진양철(이성민)의 차남이자 순양화재보험 사장. 눈치도 빠르고 잔머리도 빠삭했다. ‘장자승계’ 원칙의 순양에서 무능한 형을 끌어내리고 왕좌에 오르려 부단히 노력하는 인물이었다.
다작하는 배우지만 매 작품 새로운 얼굴을 보여준다. 이를 뒷받침하는 건 그만의 연기력이다. ‘재벌집’의 진동기 캐릭터를 표현하기 위해 중점을 둔 건 대사의 속도다. 조한철은 “진동기는 말을 빠르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대사량이 많은데 늘어지게 하면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더라”고 짚었다.
“어떤 부분은 조금 힘들기도 했어요. 대사를 외우는 것과 빠르게 할 수 있게 외우는 건 다른 문제거든요. 어떤 장면은 제 욕심보다 느리기도 했죠. 조금 과장하면 구구단 외우듯 내뱉을 때 오는 쾌감이 있어요.”
실제론 사랑받고 자란 막내다. 형은 장남이라, 누나는 고명딸이라, 조한철은 막내라 모두 이유 있는 사랑을 받고 자란 화목한 가정이었다. 진동기와는 반대의 상황이었다. 그래서 대본에서 답을 찾았다. 우연히 본 ‘형제 관계 성격유형’ 글도 도움이 됐다. 당시 둘째에 대한 설명에 정체성 혼란, 낮은 자존감 등의 특성이 있었다고.
그는 “장자승계 집안에 바로 태어난 여동생까지. 존재 자체가 전쟁이었을 거다. 대본을 보니 진동기가 둘째의 전형이더라. 샘도 많고 공부를 잘해야 아버지가 봐 줄 거라 생각했을 것”이라며 “눈치 보느라 눈을 많이 굴린다. 욕심도 많아서 밥이 나오면 열심히 먹는다”고 디테일하게 묘사했다.
역술인 비서 백상무(강길우)에 대해서도 ‘차남 진동기’의 특성을 연결해 답했다. “진동기는 똑똑한 게 아니라 공부를 잘한 거다. 누군가의 눈에 들려고 공부를 한 사람이라 나약하고 일희일비한다. 아버지가 잘했다고 하면 그런 것”이라며 “그러다 보니 주술에 빠졌다. 이상해 보이지만 자존감 약한 진동기를 생각하면 그럴 것 같았다”고 했다.

‘재벌집’은 동명의 인기 웹툰을 원작으로 했다. 조한철은 대본에 충실하게 작품을 준비했다. “대본을 보고 힌트가 너무 없다 싶으면 원작을 봐서 찾아내려 한다”면서 “대본에 있으면 헷갈리지 않게 대본대로 가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드라마는 배우의 생명력이 있다. 원작을 구현하기보단 작가님의 생각 구현하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돌아봤다.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대부분 진양철 등장 신이었다. 침을 흘리는 진양철의 모습을 본 조한철은 “그냥 보면 별거 아니지만 그걸 생각하는 게 힘들다. 그런 선택이 고맙고 놀라웠다”고 존경심을 표했다. 진도준(송중기)가 눈물을 쏟은 진양철의 유언 영상도 마찬가지다. 여기에 더해 신스틸러 진형준(강기둥)의 등장을 떠올렸다.
“밥 먹으러 오면 어느 날은 서태지로 어느 날은 문희준으로 와있고.(웃음)벌써 세 번째 같이 작품을 하는 사이라 진짜 많이 놀렸어요. 기둥이도 많이 쑥스러워하더라고요. 그런데 너무 잘 하지 않았나요? 너무 재미있었죠.”
조한철이 꼽은 ‘재벌집’ 흥행의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진양철이 역대급 캐릭터였다. 드라마는 일상적인 소재가 많은데 재벌가라는 독특한 소재와 그동안 잘 보지 못했던 캐릭터 플레이를 볼 수 있는 것이 이유이지 않을까”라고 짐작했다.
나이 차가 크게 나지 않는 배우들이 부모와 자식의 연을 맺었다. 처음엔 놀랐지만, 이성민의 변신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젊은 나이에 진양철 같은 노역을 한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특히 카메라 매체에 들키지 않고 한다는 건 시도조차 안 해볼 것 같은 일”이라고 했다.
“사실 연극 관객들은 관대해요. 젊은 사람이 노력해도 믿어주시거든요. 그렇지만 카메라는 절대 안 믿어주잖아요. 저는 못 할 것 같아요. (웃음) 그런데 그걸 해내시더라고요. 구경하고 있을 정도로 신기했어요. 관객의 입장에서 감탄하며 봤죠. 나에게 있는 모습을 지우고 새로운 캐릭터를 보여준다는 건 정말 어려워요. 체화되어야 가능한 건데 성민이 형은 그걸 체화시켜 오셨더라고요. 감동이었어요.”

재벌가를 다룬 시대극이자 회귀물. 배우들의 면면도 빛났다. 조한철은 “녹록지 않은 배우들이 모였다”고 했다. 실력 있는 배우들이 모여 애드립도 쏟아졌다. 그 상황조차 재밌었다. 리허설도 충분히 못 하고 촬영하기 바쁜 현장이었지만, 서로 연습하며 호흡을 맞춰가며 완성되는 연극 같은 현장이었다.
조한철은 “실존하는 재벌가의 캐릭터를 생각하진 않았다”고 했다. 대본에 집중하다 보니 자신의 캐릭터에 애정도 생겼다. 진동기의 상황에 몰입해 화도 냈다. “특히 화영이가 딴짓하고 신경질은 ‘팍’ 내는데 그게 그렇게 꼴 보기 싫더라”고 했다.
술에 취한 진동기가 진양철의 응접실 문을 활짝 열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장면이 있었다. 조한철은 “이 집안에서 내 존재감을 뽐내고 싶었다. 집에 쳐들어가서 형한테도 가만히 있으라고 하면서 끝장을 보겠다고 소리치면서 내가 진짜 하고 싶었던 이야기도 넣어서 한 것 같다”고 했다. 진동기가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수 있는 장소를 택한 것도 조한철이다. 그는 “리허설을 하면서 생각했다. 아버지(이성민)가 확 치고 나오는데 주춤하며 밀려나게 되는 것도 실제 상황이었다. 성민이 형이 소리 지르면 정말 놀란다. 언제 소리를 지를지 모르니까 더 그렇다”며 “그리고 아버지에겐 공격을 못 하고 하소연을 하게 되더라”고 촬영 비화를 전했다.
지난달 25일 방송된 ‘재벌집 막내아들’ 마지막 회는 26.9%(닐슨코리아, 전국기준)를 기록하며 지난해 미니시리즈 최고 시청률로 막을 내렸다. 6.1%의 첫방송 시청률의 4배를 넘는 수치로 대박을 터트렸다. 다만 엔딩은 원작과 달랐다. 마지막 회가 방송한 이후 수일간 온라인을 뜨겁게 달굴 만큼 파격적인 ‘참회 엔딩’ 이었다. 종영을 앞둔 인터뷰였기에 조한철은 “오히려 사전 제작이어서 다행이다. 너무 관심을 받으면 엔딩이 달라지기도 하는데, 나는 작가님의 생각을 존중한다”고 밝혔다.
작품의 흥행을 바라보는 조한철의 관록도 돋보였다. 그는 ‘재벌집’의 성공을 두고 “너무 애쓰지 말고 살던 대로, 하던 대로 꾸준히 해나가다 운 때가 맞으면, 혹은 합이 맞는 사람을 만나면 이렇게 터지기도 하는 거다. 우리 살던 대로 잘, 꾸준히 살아보자”는 메시지를 남겼다.
정가영 기자 jgy9322@sportsworldi.com
사진=눈컴퍼니, JTBC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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