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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준의 클래식 음악 속 인문학] 벡사시옹(Vexation)-왕짜증

입력 : 2020-06-02 14:35:03 수정 : 2020-06-02 14:3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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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한적한 시골길, 앙상한 나무 한 그루만이 서있는 언덕 밑에서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라는 두 방랑자가 고도라는 인물이 나타나기를 기다린다.

 

그들 자신도 헤아릴 수 없는 아주 오래전부터 기다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고도라는 인물이 누구인지, 기다림의 장소와 시간이 확실한지조차 분명치 않다. 

 

지칠 대로 지쳐 있는 그들은 이제는 습관이 되어 버린, 지루한 기다림이 끝없이 반복된다.

 

사무엘 베케트의 부조리극 ‘고도를 기다리며’의 내용이다.

 

 

끝내 안 오는 건지 아니면 내일이라도 오는 것인지 그만둘 수도 포기할 수도 없는 지루한 일상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기다림.

 

끝없이 반복되는 인간들의 일상에 대한 표현이기도 하다.

 

‘고도를 기다리며‘는 베케트가 2차 대전 당시 겪은 피신 생활의 경험이 밑바탕된 것으로, 그가 남프랑스의 보클루즈에서 숨어 살면서 전쟁이 끝나기를 기다리던 자신의 상황을 끝없는 기다림으로 작품화한 것이다.

 

위의 극 ’고도를 기다리며‘에 가장 잘 어울릴만한 배경음악을 선정한다면 나는 주저없이 에릭 사티(Eric Satie)의 피아노곡 벡사시옹(Vexation)을 선정할 것이다.

 

고도를 기다리며를 위한 곡처럼 반복되는 지루함에 이 곡보다 제격인 것은 없기 때문이다.

 

벡사시옹은 악보로 1페이지 밖에 안되는 피아노 소품인데, 놀라운 것은 악보위에 지시어로 '840회 반복'이라고 적혀 있다.

이 악보를 840번 연주하면 적게는 10시간에서 18시간이 걸린다.(템포를 느리게 한다면 24시간이라도 가능)

 

1963년에 이곡을 처음 연주했던 사람은 현대음악가 ‘존 케이지’이며 네명의 연주자가 번갈아 가면서 연주를 했다. 어떤 일본 피아니스트는 혼자서 10시간을 연주했다고도 한다. 

 

가장 최근에 연주는 독일 피아니스트 ‘이고르 레비트’로 지난달 30일(현지시간) 오후 2시부터  다음 날 오전 5시 30분까지 15시간 30분간이 걸렸다. 그는 에릭 사티의 ‘짜증(Vexations)’을 연주하며 유튜브와 인스타그램으로 중계했다. 

‘벡사시옹을 연주하면서 그는 화장실을 두 번 다녀왔고 피아노 옆에는 음료수와 간단한 간식거리가 있었다. 

 

사람들은 이곡을 작곡한 에릭 사티의 의도가 무엇인가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지만, 필자 개인적 생각으로는 ‘사티 자신의 권태로운 생활에 대한 음악가적 블랙유머가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해 본다.

 

엊그제였나 싶었던 2020년이 벌써 절반에 이르렀다. 

 

국내서 처음 코로나바이러스 확진자가 나온 1월 20일 이후, 반복되는 감염과 경고의 문자메시지 등 매사가 에릭 사티의 음악처럼 ‘Vexation(짜증)’ 일 수도 있다.

 

하지만 살아가는것, 인생 자체도 끈기가 필요 하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참고 인내하고 서로 서로를 존중하며 살다 보면 반드시 질병도, 경제도, 우리 사회도 좋은 날이 곧 올 것이다. 

 

사무엘 베케트의 전쟁도 끝났던 것처럼.

 

 

글=이호준 문화해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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