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츠월드=이지은 기자] 현대 프로야구에서 ‘예의’는 필요할까.
과거부터 야구의 '불문율'은 상대에 대한 예의에 관한 문제로 여겨졌다. ‘내가 당신의 감정을 존중한다’는 메시지를 담은 행동수칙이었다. 점수 차가 크게 난 경기에서 도루하지 않는 건 무기력하게 패한 팀의 자존심을 지켜주기 위해서다. 홈런을 날린 뒤 타석에서 타구를 오래 쳐다보지 않는 건 바로 앞에서 쓰린 속을 달래야 하는 투수가 서 있기 때문이다.
불문율 논란을 일으킨 지난 26일 광주로 돌아가 보자. 당시 9회말 아웃카운트 하나를 남겨두고 마무리 정우람이 마운드에 오르자, 김기태 감독은 불펜에 있던 투수 문경찬을 대타로 세워 스탠딩 삼진을 당하게 했다.
맥락을 보려면 시점을 더 앞당겨야 한다. KIA가 7회초 4실점하며 이미 지고 있던 경기의 점수는 5-12로 벌어졌다. 8회초 KIA는 외야 수비진에 백업 선수들을 투입했다. 사실상 백기투항에 8회말 한화도 내야를 교체하고 추격조를 투입했다. 그러나 유격수 실책, 3루타, 볼넷, 폭투가 쏟아지며 KIA가 2점을 올렸고, 한화는 필승조 이태양을 투입해 간신히 이닝을 막았다. 9회말 KIA는 6번 이명기, 7번 나지완의 자리에 차례로 대타를 투입했다. 정우람이 등장한 건 8번 황대인을 상대로였다.
김기태 KIA 감독은 이런 부분에서 전통적인 야구관을 가진 지도자다. 팀이 이미 크게 지고 있는 상황에서 상대 마운드가 셋업맨을 올렸지만, 몇 명 남지 않은 남아 있던 주전 멤버까지 모두 교체한 건 ‘패배에 승복했다’는 시그널을 보낸 것이다. 여기에 하위타선을 상대로 기어이 마무리가 올라왔으니 김 감독의 입장에서는 가드를 내렸더니 어퍼컷이 날아온 셈이다. 팀은 개막 3연패에 빠진 상태였다. 도발로 느낀 상대의 행동에 대응하지 않는 건 팀 사기의 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
한용덕 한화 감독으로서는 실리를 더 중시한 선택이었다. 한 감독은 경기가 끝난 뒤 정우람의 등판 이유를 ‘점검 차원’이었다고 설명했다. 한화는 개막 후 석패와 대승을 오간 탓에 세이브 요건이 만들어지지 않았다. 게다가 추격조가 등판해 스트라이크존에 공을 넣지도 못한 채 소위 ‘볼질’을 하다가 대량실점을 할 뻔했다. 상대가 느낄 열패감에 비해 내가 느끼는 불안감이 더 컸다고 해도 이상한 상황이 아니다.
‘어디까지가 예의인가’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갈등은 종주국인 미국보다도 한국에서 더 잦다. 고교야구 자체가 풀이 넓지 않아 프로에 데뷔하는 선수들이라면 다들 일면식은 있는 사이다. 결국 이들이 코치, 감독으로 커리어를 이어가며 단순 동업자 이상의 끈끈한 선후배 관계가 형성된다. 상대를 배려하지 않는 듯한 행동이 쉽게 납득되지 않는 환경이다.
그러나 프로야구가 걸어온 변화의 길은 불문율을 무색게 한다. 과거 팀들은 경기 후반 승부가 완전히 기울었을 때 득점을 내는 것을 삼갔지만, 이제는 승리를 보장하는 득점 차는 존재하지 않는다. 타격 일변도의 흐름 속 두 자릿수 점수 차를 뒤집는 경기도 2018시즌 KBO리그에 속속 등장했다. 프로팀의 존재 목적이 ‘승리’인 상황에서, 현대 야구는 어디까지 예의를 지켜야 할까. 투수 대타 논란이 던지는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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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OS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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