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문 현판을 쓴 사람이 매국나 이완용이란 주장이 제기됐다. 이유는 무엇일까.
26일 방송한 MBC '서프라이즈'에서는 독립문 현판을 쓴 사람이 이완용이라는 주장에 대해 파헤쳤다.
독립문은 1897년 서재필을 중심으로, 안경수, 윤치호, 김가진, 이상재 등이 독립협회의 주도 하에 서재필이 파리의 개선문을 본 따 구상한 것을 건축가 심의석이 직접 시공했다. 태극기와 함께 한글과 한자에 독립문이라고 쓰여있다.
현판은 기록이 남아있지않아 궁금증을 자아냈다. 독립문 현판을 쓴 사람이 이완용이란 주장이 제기됐다. 1999년 윤덕한 작가의 '이완용 평전'에 적혀있다.
이완용은 1905년 을사늑약을 체결하는데 앞장선 을사오적중 한 명이다. 1910년 한일강제병탄조약을 체결해 국권을 팔아넘긴 매국노다.
독립문은 일본으로부터 독립을의미하는건 아니었다.. 1897년으로 일제강점기 이전이다. 독립문이 세워진 장소 또한 중국의 사신을 맞이했던 영은문이 있던 곳이다. 당시 독립문은 중국으로부터 독립을 상징한 것이다.
독립운동을 탄합했던 일본이 독립문을 고저 제 58호로 제적했다. 국고를 들여 보호하기도 했다. 독립협회는 독립신문에 "영은문 자리에 독립문을 세워 세계 만방에 조선이 독립군임을 표방하는 것이요"라고 취지를 밝히기도 했다.
이완용은 독립협회 위원장을 지냈다. 이후 친일 행위로 인해 제명되긴했지만 이완용이 독립문 현판을 썼다고 주장하는 이들에 따르면 이와용은 총 모금액 백원 현재 가치로 약 500만원을 기부할 정도로 영향력을 행사했다.
뿐만 아니라 명필로 유명해 독리문 현판을 썼을 가능성이 높다. 또 문서 감정가에 따르면 이완용의 글씨체와 매우 유사하다.
1924년 동아일보 기사에는 "독립문이란 세 글자는 이완용이 쓴것이랍니다. 이완용은 다른 이완용이 아닌 조선귀족 영수 후작이다"라고 쓰여있다. 일제강점기 때 쓰인 것으로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점과 1927년 김명수가 쓴 이완용의 전기에 "이완용이 한사찰의 현판을 써 내보냈다"고 기록했지만 의미가 더 큰 독립문 현판을 썼다는 기록은 없다.
김가진 선생이 썼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대한협회 회장인 김가진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고문으로도 활약했다. 필체도 비슷하고 김가진의 손자 김자동 회장은 "집안에서는 독립문 현판이 김가진의 글씨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정정화가 쓴 회고록을 보면 "독립문의 걸 현판을 적고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온라인팀 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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