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효대사의 당대는 그야말로 당나라의 찬란한 문명이 해동 3국은 물론 인도 및 동남아 넘어서까지도 거침없이 뻗어나가던 시대였다. 귀족계층의 자제라면 당나라 유학은 엘리트입문의 필수로 여겨지던 시절이다. 당시로서도 명성이 높았으며 후일의 국사감으로도 주목받던 그가 찬란한 불교사상이 꽃 피던 당나라로의 유학은 당연한 결정이었다. 후일에 국사가 되는 의상대사와 함께 길을 떠나던 과정에 그 유명한 ‘해골 물’ 에피소드는 원효대사를 견성하게 하는 모티브가 된다.
화엄경의 일체요지인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를 확철대오하게 된 그는 발길을 돌려 그야말로 온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는 무애인(無碍人)으로 거듭나게 된다. 득도를 하게 되면 십통(十通)을 이루게 되니 원효대사가 개인사나 나라의 일이나 미래를 보게 된 것은 당연하다. 당시의 불교는 현학적인 귀족불교였다. 앞으로 불교가 나아가야할 방향을 온 몸으로 보여준 것이다.
당시의 문맹률은 90%가 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각 경전은 대승불교 학자들에 의해 교학중심으로 관념화, 이론화되어 일반대중들이 불교를 이해하기는 더욱 어려워졌다. 부처님 말씀이 현학적으로만 번역되고 연구되는데 빠져가는 것이다. 이에 원효는 본인의 깨달음과 함께 실천적 보살도를 행하는 것이 곧 불국토를 이루는 것임을 온 세상에 말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빌려주겠는가? 나는 하늘을 받칠 기둥을 찍으련다..”라고 노래하고 춤추며 저자거리를 다니며 거지나 어린 아이와 노인을 구별 않고 무애가(無碍歌)를 부르며 불도를 전한다.
글을 모르는 사람도 불도를 이룰 수 있으니 이 때 염불에 의한 민중불교가 뿌리내리게 된다. 당시의 귀족세계에게 원효대사의 이러한 기행은 충격 그 자체였다. 그러나 원효대사는 무엇보다도 경전이론에서도 대가였으니 그 누구도 어쩌지를 못했다. 원효대사의 여러 저술서는 물론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와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은 중국, 일본은 물론 예나 지금이나 인정을 넘어 존경의 경탄까지 받는 명 주석서이다.
그야말로 본각을 이룸은 물론이요, 이론과 실천을 따를 자 없는 인류 애자였던 것이다. “중생이 아프니 보살도 아프다..”는 유마경의 말이 아니더라도 우리 모두는 안다. 아이가 아프면 엄마도 아픈 이유를.. 이것이 바로 원효대사가 잘 나가던 엘리트 승려에서 무애가(無碍歌)를 부르며 ‘낮은 곳에서 받드는 삶’을 살지 않을 수 없던 이유이다.
비슷한 시기를 함께한 육조혜능선사와 원효대사가 실제로 만났었다면 불교의 역사는 핵융합에 해당되는 발전을 능가했을 것만 같다. 원효대사가 육조혜능보다 20년 정도 먼저 태어나셨으니 인연만 닿았다면 선종의 중조와 민중불교의 효시로서 대승실천의 무애인(無碍人)이었던 두 걸출한 부처와 부처가 서로를 알아보았을 터이다.
달마가 서쪽에서 온 이래(祖師西來意) 수도 없이 많은 역대 전등 제대조사가 있었건만 우리에게 원효대사는 몇 분이나 될까?
김상회 역학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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