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관집 셋째아들로 태어난 그는 사진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운명적 관계다. 그의 부친은 남도 끝 벌교 읍내에서 그가 중학교를 마칠 때까지 사진관을 운영했다. 수재 집안으로 소문난 집에서도 소년 문승일은 특히 머리가 좋았다.
머리 좋은 사람이 흔히 그렇듯 그 또한 어릴 적부터 유별나게 호기심이 많았다. 모든 게 궁금했다. 날아가는 비행기를 보면 어떻게 해서 쇳덩이가 하늘에 떠 있는지 신기해 눈앞에서 멀리 사라져 갈 때까지 쳐다봐야 직성이 풀렸다. 진공관 라디오에서 목소리가 들려오면 그 속에 사람이 들어있지나 않은지 마냥 궁금했다.
“부친이 암실 작업을 할 때 가끔 따라 들어가 하얀 인화지 위에 마술처럼 솟아오르는 사람의 얼굴을 보면서 얼마나 놀라워했는지 모릅니다. 또 여름밤이면 집 옥상에 누워 뿌연 우윳빛 은하수를 바라보며 우주가 얼마나 넓은지 궁금했습니다. 나는 그런 신비를 파헤치는 과학자가 되고 싶었습니다.”
강한 호기심과 궁금증이 그에게 특이한 취미를 갖게 하고, 오늘날의 교수 문승일을 있게 하지 않았을까.
그의 취미는 과학자가 되리라는 그의 꿈이 성취되기까지 몇 단계를 거치며 발전했다. 10대에는 리디오조립, 20대에는 아마추어무선햄(HAM), 30대에는 클래식음악과 라디오컨트롤(R/C), 40대 후반의 나이인 지금엔 사진이 그의 취미다.
#10대, 라디오 조립으로 과학자 꿈꿔
초등학교 5학년 학기 초에 교과서를 받아보니 광석라디오를 만드는 방법이 나와 있었다. 그 길로 전파상을 향해 냅다 달렸다. 광석 다이오드, 리시버, 가변 콘덴서 등 필요한 부품을 구했다. 친구 형이 가지고 있던 납 인두를 빌려와 책에 나와 있는 대로 조립을 한 후 긴 철사줄로 안테나를 만들어 달았다. 리시버를 귀에 꽂았다.
서울대 공대 그의 연구실에서 문 교수는 당시의 감격을 이렇게 표현했다.
“아 그때 들려오는 소리의 신기함이란…. 그때 내 귀에 들려오던 음악소리를 나는 평생 잊을 수 없습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고 손에 잡히지도 않는 전파가 방송국 안테나를 떠나 빛의 속도로 우주공간을 날아와 내 라디오의 안테나에 앉아서 소리를 낸다는 것이 나에겐 가슴 뛰는 경이로운 경험으로 새겨졌습니다.”
그 후 그는 중·고등학교를 거치면서 제법 복잡한 구조의 라디오도 만들어 보고, 고무동력으로 날아가는 모형 비행기도 만들었다. 작은 모터로 구동되는 자동차와 보트를 만들어 보면서 엔지니어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굳혔다. 주변에선 법대나 의대에 진학할 것을 권유했지만 그의 결심은 확고했다.
#20대 미국 유학시절과 아마추어무선햄
대학을 졸업하고 그는 미국 오하이오주립대로 국비유학을 떠났다. 몇 년을 바쁘고 힘들게 공부를 해 석사학위를 받고 나니 그간 엄두도 못 내었던 취미생활을 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누가 전기공학도 아니랄까봐 취미도 자연스럽게 전기·전파 와 관련된 게 선택됐다. 아마추어무선햄에 도전했다.
몇 달 동안 학교 공부 틈틈이 아마추어무선 면허시험을 준비했다. 모르스부호를 익히고 무선법규를 공부해 고급단계인 어드밴스드(Advanced)급 면허시험에 합격했다. 호출부호 N8NSQ가 배정됐다. 한 달 생활비에 해당하는 300달러를 주고 중고 무전기를 구입했다. 학생 아파트 뒤뜰 빨랫줄에 임시 안테나를 설치한 후 교신을 시도했다.
“긴장이 되어 모르스부호가 아련히 들리고 손가락이 덜덜 떨리던 것이 지금도 기억에 새롭습니다.”
특히 한국과의 교신은 고국을 떠나온지 몇 해 지나면서 찾아온 향수병을 달래는 데 그만이었다. 지금도 그의 연구실에는 ‘Kenwood TS830’ 무전기가 그의 곁을 지키며 ‘젊은 날의 추억’을 되살려 주고 있다.
#30대 라디오컨트롤과 클래식음악 심취
| 고궁을 즐겨찾는 문 교수가 틈틈이 찍은 사진 중 하나인 경복궁 향원정. |
미국에 유학 온 지 7년 만에 전기공학박사학위를 땄다. 수년 동안 그의 머릿속은 복잡한 전기회로가 점령했다. 무언가 강렬한 것으로 스트레스를 풀 순 없을까. 주파수를 이용해 무선으로 모형을 조정하는 라디오 컨트롤(R/C)이 그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라디오를 만들던 고사리손은 어느덧 R/C 자동차와 비행기를 직접 만들 수 있을 만큼 자라 있었다.
실린더가 장착된 엔진을 이용하는 모형자동차는 비록 크기는 작지만 속도는 보기보다 빠르다. 문 교수는 연구실 책장 위에 있던 모형 자동차를 꺼냈다. 미국에서 ‘몰던’ 추억 속의 물건이다. 그는 “크기는 작아도 시속 100km까지 속력을 내는 것도 있다”며 “지정된 코스를 손살같이 달리는 모형자동차를 바라볼 때면 박진감으로 온 몸이 짜릿해진다”고 R/C의 묘미를 설명했다.
머리가 하얗게 된 아찔한 경험도 있다.
“우리나라에는 모형 비행기를 날릴만한 장소가 많지 않아 망설이던 중 마침 2005년 미국 시애틀로 교환교수를 나갈 기회가 있었습니다. 몇번의 연습 끝에 아침 일찍 동틀 무렵 아무도 없는 R/C비행기 전용 비행장으로 나가 솔로 비행을 시도했습니다. 비행기가 잔디밭을 박치고 하늘로 솟구치자 흥분과 감격으로 잠시 냉정함을 잃고 말았지요. 비행기는 점점 멀어지더니 마침내 키 큰 포플러 나무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순간적이지만 머릿속이 하얗게 되는 아찔한 경험이었습니다.”
그 후 그는 많은 연습을 통해 마침내 공중제비를 도는 루프(Loop), 옆으로 회전하며 날아가는 롤(Roll), 뒤집어져서 나는 인버티드 플라이트(Inverted Flight) 등의 비행기술을 습득한다.
“라디오 컨트롤 취미는 나의 공학적인 취향에서 시작된 것이지만, 먼지를 날리며 굉음을 울리면서 질풍처럼 달리거나 새처럼 자유롭게 하늘을 나는 체험을 간접적으로나마 할 수 있게 해주는 통쾌한 맛이 있어서 좋았습니다.”
1993년 국립대(전북대) 교수로 생활의 안정을 찾으면서 좋아하던 클래식 음악에 부쩍 관심을 기울인다. CD보다 LP의 온화한 음색이 좋아 주로 중고 국산 라이선스판을 사서 듣는다는 그는 드디어 ‘소리’에 눈을 떴는지 요즘 부쩍 오디오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연주자로는 구 소련의 바이올리니스트 다비드 오히스트라를 무척 좋아한다.
#40대 초반, 사진에 빠지다
| 기자가 찍은 사진이 잘 나왔나 캐논 5D 카메라를 들여다 보고 있는 문승일 교수. |
문 교수는 초등학생 때 아버지의 암실에서 직접 사진을 뽑아본 경험이 있다. 그런 그가 40이 넘어 사진에 관심을 가진 이유가 궁금할 뿐이다.
“본격적으로 취미삼아 사진을 찍기 시작한 것은 4년 전 아내의 권유를 받고부터입니다. 학술논문 발표차 외국 출장 기회가 많았은데 그때마다 사진을 찍어두면 좋은 추억이 될 것 같았습니다. 처음에는 컬러슬라이드 필름을 이용해 풍경이나 정물사진을 많이 찍었어요. 그러다 점차 사람의 모습을 찍는 것이 재미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컬러보다 흑백사진이 더 깊은 맛이 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람의 마음 속에 들어있는 생각을 사진으로 표현해 보고 싶다.’ 그가 사진을 찍는 이유다.
고급기종인 라이카를 비롯해 다양한 카메라를 갖고 있는 문 교수는 “안셀 아담스와 같은 기술적 완벽성을 갖추고 카르티에 브레송처럼 결정적인 순간을 포착해 찍고 싶다”며 “아직은 그런 경지에 요원하지만 평생 노력하면 좋은 사진을 찍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대학교수 생활을 은퇴할 때 사진집을 만들어 제자들과 지인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고 덧붙였다.
“우리에게 아무 이유 없이 그저 좋고 즐거운 일이 하나쯤 있다면 그 인생은 행복하지 않겠는가. 나는 비교적 많은 분야의 다양한 취미를 즐겨왔지만 그 공통점은 내 인생을 풍요롭게 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고달프고 힘든 생활의 탈출구도 되어 주었고 또 내 인생의 꿈을 펼쳐가는 데 많은 도움을 주기도 했습니다.”
글·사진 강민영 기자
mykang@sportsworldi.com
◆문승일 교수 약력 및 연구
▲1961년생 ▲서울대 공대 전기공학과 졸업(1985년) ▲미 오하이오 주립대 국비유학 ▲전북대 전기공학과 교수 역임 ▲현 서울대 전기공학부 교수 ▲한전 발전자회사 경영평가 위원 ▲서울대 기초전력공학연구원 기획실장
▲전력시스템 : 우리나라 전력을 안정되게 공급하기 위한 연구활동 ▲신재생에너지: 풍력발전에 특히 관심, 제주도 풍력발전 단지 개발·연구
[명사들의 취미]전체보기
[ⓒ 세계비즈앤스포츠월드 & sportsworldi.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