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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영 기자의 온몸 체험] ‘어설픈 방망이’가 힐만 감독의 ‘배팅볼’을 만났을 때

입력 : 2018-09-11 09:00:00 수정 : 2018-09-10 19:2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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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월드=인천 정세영 기자] 타격 하나는 자신 있었다. 홈런을 뻥뻥 때려내지 못해도, 대학 시절까지 포함하면 사회인 야구 경력 20년이 훌쩍 넘는다. 사회인리그에서 리그 전체 타율 3위에도 오른 적이 있다. 1년에 한 번 대한민국 야구 기자들이 모여 야구를 하는 날에는 “정말 잘 친다”는 칭찬 일색이다. 이런 기자의 실력을 발휘할 기회가 찾아왔다.

 

트레이 힐만 SK 감독은 리그에서 선수들에게 배팅볼을 자주 던져주는 사령탑으로 유명하다. 지난시즌에는 상대 우완 투수의 등판이 예정된 날이면, 어김없이 마운드에 올라 공을 타자에게 던졌다. SK 선수들은 힐만 감독의 배팅볼에 칭찬 일색이다. 간판타자 최정은 “공을 밀어치는 연습을 많이 하는 데, 감독님 공은 밀어치기 까다로운 각도에서 날아오기 때문에 연습하기 좋다”고 평가했다.

 

힐만 감독의 배팅볼을 직접 체험하고 싶었다. 그리고 구단의 허락을 얻었다. 디데이(D-day)는 아시안게임 브레이크(8월17~9월3일) 기간 중으로 잡혔다.

●‘그냥 하지 마세요!’

 

단단히 준비했다. 스크린 야구장을 자주 찾아 준비했다. 선수들은 한사코 말렸다. 망신을 당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저 그래도 수준 있는 사회인리그에서도 꽤 잘 쳤어요”라는 말에는 “아니, 그 공이랑 배팅볼을 다르다니까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날씨가 심술을 부렸다. 8월28일이 ‘디데이’였지만, 비가 내려 무산됐다. 바로 다음 날로 연기했지만 그날 역시 비가 내렸다. 어쩔 수 없이 포기했다. 하지만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고 했던가. 힐만 감독도 아쉬운 눈치였다. 그러다 지난 2일, 우연히 인천SK행복드림구장을 찾았는데, 힐만 감독으로부터 뜻밖의 요청을 받았다. “정 기자, 우리 9월5일에 합시다. 2시까지 나오세요.” 기뻤다. 부랴부랴 다른 체험 기삿거리를 찾고 있었던 때였다. 어렵게 성사된 기회. 이번에는 비가 내리지 않겠지.

●드디어 ‘디데이’가 왔다

 

9월5일. 이른 아침 눈이 저절로 떠졌다. 바로 창밖의 날씨를 살폈다. 화창했다. 아침방송의 기상캐스터는 “인천 지역은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씨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체험이 시작됐다. 배트 등 체험에 필요한 장비는 선수들이 흔쾌히 빌려줬다. 김재현의 나무배트, 이재원의 배팅 장갑, 헬멧은 최승준의 것이었다.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보니, 불록하게 나온 배는 어쩔 수 없었지만 제법 자세가 나왔다.

 

오후 1시50분. 코칭스태프 미팅을 마친 정경배 타격코치가 일일 전담 코치가 됐다. “자세를 한번 잡고 서봐요.” 우렁찬 대답과 함께 자세를 잡았다. “그간 배트를 이렇게 잡고 쳤어요?”, “하체는 튼튼한데, 이 배를 어쩜 좋아”라는 쓴소리만 들었다. 몇 번의 스윙 연습을 하자, 정 코치의 표정은 굳는다. ‘뭔가 잘못됐나’라는 생각이 들려던 찰나, 힐만 감독이 그라운드로 나왔다.

 

“미스터 정!, 아 유 레디”라고 묻는다. 얼떨결에 “예스”라고 대답을 했다. 다가온 힐만 감독은 대뜸 사진을 찍자고 했다. “평소 경쟁 상대와는 사진을 찍지 않는데, 오늘은 예외”라면서 기자 옆에 섰다. 그런데 갑자기 볼록 나온 내 배를 툭 치면서 한마디를 던진다. “굿 럭!”.

●헛스윙만 붕붕, 좀 봐 줄줄 알았건만...상대를 잘못 만났다

 

떨리는 마음으로 타격 케이지에 섰다. 힐만 감독은 본격적인 배팅볼에 앞서 연습을 하라며 공을 던져주겠다고 했다. 하나, 둘, 셋! 딱. 경쾌한 타격음과 함께 내가 때린 타구가 외야 한가운데로 떨어진다. ‘됐어! 됐다.’ 힐만 감독의 표정을 보니 깜짝 놀란 눈치다. 이어 여러 개의 공을 모두 외야로 날렸다. 마침 구경 나온 선수들과 몇몇 코치들도 “이야”라며 탄성을 내질렀다. 포수 마스크를 쓰고 공을 받아준 불펜 포수 나카니시 카즈미는 “사회인 야구를 하셨어요?”라고 물었다. 어깨가 으쓱해졌다.

 

하지만 여기까지였다. 힐만 감독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준비가 끝났으면, 이제부터 진짜”라고 했다. 타격폼을 잡는 찰나 공이 ‘휙’하고 날아왔다. 헛스윙. 다시 한 번 공이 날이 든다. 점점 빨라진다. 별로 힘을 들이는 것 같지 않은데, 직선으로 날아와 스트라이크존에 꽂히는 것은 변함이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힐만 감독이 즉석 제안을 했다. 5개의 아웃카운트를 두고 내기를 하자는 것이었다. 힐만 감독은 “직구와 커브, 슬라이더, 체인지업, 너클볼을 던지겠다”고 했다. 몸에 힘이 빠졌다. 호흡도 가빠졌다. ‘어쩌지 그냥 그만둔다고 할까.’ 그만둔다고 하기에도 쑥스러워 이를 더 악물었다. 이어 대결이 시작됐고, 다양한 공이 내 눈을 속였다. 순식간에 아웃카운트가 늘어났다. ‘변화구만 제대로 치자.’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카운트에 몰렸을 때 변화구를 기다렸고 몇 개의 타구가 내야를 넘었다. 힐만 감독도 “굿!”이라고 외쳤다.

 

대결은 당연히 싱겁게 끝났다. 힐만 감독은 체험을 마친 뒤 내 어깨를 툭 졌다. 그러고는 “야구를 한 것이 느껴진다”면서도 “하지만 아직 와이번스에서 뛰기에는 아직 준비가 안 됐다”고 웃었다.

 

체험이 끝난 뒤 몸은 땀으로 범벅이 돼 있었다. 나무배트가 익숙지 않았던 탓에 오른손 엄지손가락 밑이 퉁퉁 부었다. 기자실로 발걸음을 돌리면서 ‘힐만 감독은 열정이 넘치는 지도자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힐만 감독이 선수들에게 배팅볼을 던져주는 이유

 

힐만 감독은 왜 배팅볼을 던져주는 것일까. 가장 큰 이유는 타자들의 타격 메커니즘을 체크하기 위함이다. 그는 “게임상에서 몇몇 타자들의 스윙이 좋지 않을 때, 특히 자신의 스트라이크존 안에서 스윙이 벗어나 있다는 생각이 들 때 마운드에 오른다. 직접 체크를 한 사실을 선수들에게 알려주기 위해서다. 무엇보다 더그아웃에서 보지 못하는 각도를 직접 확인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다른 노림수도 있다. 그는 “내가 마운드에 올라가면 타자들이 좀 더 집중해서 치는 효과도 있다”고 웃었다. 그렇다면 힐만 감독이 직접 배팅볼을 던져줬을 때 SK의 승률은 어땠을까. 구단 관계자는 “승률을 따져 보진 않았지만, 감독님이 배팅볼을 던진 날 승률이 높다”고 귀띔했다.

 

힐만 감독은 미국 메이저리그와 일본프로야구에서도 지휘봉을 잡았다. 그는 “미국에서는 감독과 벤치 코치였을 때 거의 매일 공을 던졌다”고 했다. 이어 “메이저리그에는 너클볼을 던지는 투수가 있다. 나도 너클볼을 던질 줄 안다. 그래서 너클볼 투수가 나오는 날이면 무조건 마운드에 올랐다”고 회상했다. 다만 일본에서 던지지 않았다. ‘감독이 자주 마운드에 오르면, 배팅볼 투수가 직업을 잃는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힐만 감독은 선수들과도 ‘벽’을 두지 않는다. 스스럼없이 대화를 나눈다. 그 효과는 성적으로 나왔다. SK는 지난해 5위로 ‘가을 야구’ 막차를 탔고 올해는 2위다. 2012년 이후 6년 만에 홈구장의 가을야구가 유력하다.  무엇보다 SK는 힐만 감독의 부임 첫해인 지난해 역대 한 시즌 가장 많은 홈런을 날린 팀이 됐다. 올해도 여전하다. 감독의 배팅볼이 많은 홈런을 양산했다고 할 순 없겠지만 이런 노력은 SK가 리그 최고의 홈런 군단으로 변모하는데 한몫했음이 틀림없다. 

 

niners@sportsworldi.com 사진=김두홍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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