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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원의 쇼비즈워치] '군함도' 를 둘러싼 현상, 그 속성은?

입력 : 2017-08-01 19:06:31 수정 : 2017-09-28 17:3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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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일 개봉한 영화 ‘군함도’가 연일 대중문화계 이슈 전체를 삼키고 있다. 두 가지 큰 이슈가 뒤섞여 휘발성이 치솟은 탓이다.

하나는 한국영화시장에서 고질적으로 제기돼왔던 스크린 독과점 문제다. 개봉일 2027개 스크린에서 상영된 ‘군함도’는 역대 스크린 수 확보 신기록을 세웠다. 기존 1위는 지난해 개봉한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의 1991개 스크린이었다. 다른 하나는 일제시대 참상으로 소개된 에피소드를 다룬 영화가 반일 메시지를 충분히 전하지 않았다는 데 따른 반발이다. 전반적으로 서사가 ‘좋은 조선인 vs. 나쁜 조선인’ 구도 중심인데다 징용과정 및 군함도 내 생활상 등도 딱히 비참하게 그려지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이제 그 두 가지 이슈가 섞여, 왜 이런 ‘문제적 영화’가 그토록 많은 스크린을 차지해 다른 영화 선택을 방해하느냐는 제3의 불만이 일고 있다. 결과적으로 ‘군함도’는 스크린 독과점 차원에서 같은 문제가 제기돼왔던 그 어떤 영화보다 더 강한 비판에 직면해있다.

일단 상대적으로 손쉬운 문제부터 살펴보자. 영화의 반일 메시지 전달 문제다. 당연히 역사는 일정수준 이상 사실에 기반한 다음에야 어떤 식으로건 해석될 수 있다. 각기 다른 근거들을 놓고 풀어내는 방법론이 다르다는 이유로 비판한다는 건 무리다. 사학적 관점에서도 그런데, 영화 같은 문화예술 장르야 더 말할 것도 없다. 사실상 날조 수준인데도 그냥 넘어간 예가 워낙 많다. 역사와 예술의 관계란 으레 그런 것이다.

그렇게 봤을 때, 지금 포털사이트 별점 테러 등으로 이어지고 있는 ‘안티 군함도’ 열풍 역시 일방적으로 해석하려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반일신앙에 사로잡힌 과잉민족주의 산물이란 식으로 말이다. 물론 그렇게 볼 수도 있다. 애초 ‘군함도’는 일제시대 당시 일본에 대해 비판하지 않는 영화조차 아니기 때문이다. ‘충분히 분노가 끓어오르도록 비판하지 않았다’ 내지 ‘조선인들 내분에 대한 지적은 필요 없었다’는 식 비판은 어딘지 강박증적이란 인상이다.

그러나 그렇게만 볼 수 없는 구석도 있다. 한국 관객들은 그간 일제시대 콘텐츠에 대해 생각보다 포용력이 컸기 때문이다. 같은 일제시대 배경으로도, 친일과 항일을 오고 간 실존인물 황옥을 그린 ‘밀정’, 아예 일제 만행 묘사가 거세된 에로틱 스릴러 ‘아가씨’ 등도 얼마든지 받아들인 바 있다. 이 계보는 2008년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까지 간다. 일제시대만 나왔다 하면 무조건 일본=악(惡) 공식 외엔 받아들이지 않는 맹신자들이 아니란 얘기다.

그럼 ‘군함도’ 사태는 대체 어떻게 봐야 할까. 이건 궁극적으로 ‘원작’이 존재하는 콘텐츠에 대한 배신감 정도로 보는 게 옳을 듯싶다. 여기서 원작은 크게 둘, 2015년 6월 방송된 KBS ‘역사저널 그날’의 ‘군함도의 두 얼굴-숨겨진 진실’ 편과 특히 사회문화적 반향 면에서 어마어마했던 같은 해 MBC ‘무한도전’의 ‘배달의 무도-군함도’ 편이 된다.

‘군함도’는 결국 위 두 편에서 제시된 팩트, 택한 방향성, 동원된 묘사를 중심으로 화제를 모으고 정치사회문화적 이슈로 떠오른 사건이다. 이 두 프로그램이 ‘군함도’에 있어선 이미 대중적 지지기반이 존재하는 ‘원작’처럼 기능, 여기서 벗어났을 시 콘텐츠 자체에 대한 불만과 배신감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에 반해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과 ‘아가씨’는 아예 픽션이고, ‘밀정’은 영화 이전 딱히 대중적으로 조명되지 않았던 인물 얘길 다뤄 ‘다양한 해석’의 여지가 대중적 차원에서 확보돼있었다. 그러니 별다른 위험도 없었다.

그런 점에서 지금 ‘군함도’ 상황은 단순히 반일-국뽕 노선을 따르지 않은 데 따른 대가라기보다, 수백만 부가 팔려나간 인기 콘텐츠 ‘대부’를 누군가 액션코미디로 재해석했을 때 일어나는 반발에 더 가깝다는 것이다. 물론 그래도 된다. 그런 게 창작의 자유다. 그러나 그에 따른 반발 역시 당연히 납득이 가는 것이다. 이런 리스크를 굳이 감당하겠다고 결정했다면, 그 반발에 대한 대응 역시 좀 더 치밀하고 능란하게 진행하는 편이 옳았다. 지금은 너무 감정적이고, 또 미처 예상도 못했다는 듯 어수선한 느낌이다. 그래서 자꾸 엇박자가 나고 손발이 안 맞는다. 그러니 수습도 제대로 안 된다. 좀 더 치밀한 사전계획이 필요했다.

다음, 보다 복잡한 문제인 스크린 독과점 문제다. 지난 십여 년 간 워낙 빈번하게 거론돼온 문제라 이젠 더 해석할 여지도 남아있지 않을 법하지만, 일단 한 가지는 명확히 해둘 필요가 있다. 그토록 숱하게 비판을 받고 있어도 이 시스템이 끄떡없이 유지되고, 오히려 더 강화되는 이유가 있다. 이런 시스템이 실제로 ‘먹히기’ 때문이다. 단순히 될성부른 텐트폴 영화만 잘 되고, 그런 영화들로 돈 벌어 대형 제작/배급사들 잇속만 채우고 하는 차원이 아니다. 시장 ‘전체’를 골고루 살찌워주는 역할에 성공하고 있는 방식이다.

애초 이런 배급방식이 탄생한 이유도 간명하다. 실제 한국영화시장 양상이 그랬기 때문이다. 꽤 오래 전부터 한국영화시장은 특정 될성부른 한두 영화에 쏠림현상이 강하기로 유명했다. 단관개봉 시절은 물론이고 초기 멀티플렉스 시절만 해도 이 같은 현상은 쉽게 확인 가능했다. 쉽게 말해 트렌드성이 강하단 얘기고, 다른 식으로 말하자면 밴드웨건 현상이 자주 일어나는 시장 분위기였다는 얘기다. 이런 인식이 구체화되기 시작한 게 영화시장에 대한 실제 데이터들이 나오기 시작한 1990년대 후반부터다.

한국형 블록버스터 시초로 여겨지는 1999년 작 ‘쉬리’를 보자. ‘쉬리’는 개봉 당시 전국 23개 극장에 걸리는 데 그쳤다. 당시 전국극장연합회 소속 극장수가 총 507개관이었으니 점유율로 따지면 4.5%에 불과했다. 이후 흥행가도를 달리며 상영관이 늘긴 했지만, 그래봤자 70여개 관 수준이었다. 전체의 14% 정도다. 그럼에도 ‘쉬리’는 최종적으로 전국 582만 명의 관객을 동원, 1999년 연간 총 영화 관람객 수의 10.6%(서울관객 기준)를 차지했다. 이 수치를 2016년 시장규모로 환산해보면 약 2200만 관객이 된다. 그 정도 관객동원은 아직 한국에서 이뤄진 바 없다. 그리고 이 같은 현상은 이듬해 2000년 ‘공동경비구역 JSA’ 때도, 그 다음해 2001년 ‘친구’ 때도 똑같이 벌어졌다.

배급업계가 이 같은 쏠림현상에 대응하기 시작한 건 2003~2004년경부터다. 이 특이한 시장 분위기에 일단 적응하되, 이를 가능한 활용해 시장을 활성화시키기 위한 방안을 모색했다. 그렇게 탄생된 게 바로 ‘연쇄 스크린 독과점’ 시스템이다. 어차피 한 시기 모든 관객이 한 영화에 쏠려버리는 극단적 트렌디 시장임을 감안, 될성부른 영화가 나오면 초장에 대규모 배급을 통해 관객을 한꺼번에 불러들인 뒤, 1~2주 단위 빠른 영화 교체를 통해 계속 트렌드성을 살려가며 가능한 많은 영화들에 기회를 주고 극장도 살리는 방식이다. 미국식 ‘무비 오브 더 위크’ 배급개념을 더 극단적으로 확대시킨 개념이다.

그리고 이게 맞아떨어졌다. 가장 최근 통계인 2016년 한국영화산업 통계와 그 10년 전인 2006년 통과만 비교해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극장관객수는 1억6385만 명에서 2억1702만으로 훌쩍 뛰었고, 1인당 관람횟수는 3.4회에서 4.2회로 늘었다. 단순히 시장규모만 늘어난 게 아니다. 흔히 흥행성공 라인으로 불리는 전국 200만 관객 동원작은 2007년 총 15편에서 2016년 32편으로 배 이상 늘었다. 그중 각각 10편과 15편이 한국영화였다. 이를 100만 기준으로 늘려놓고 봐도 2007년 34편에서 2016년 51편으로 늘어난다. 더 많은 관객이 극장을 찾고, 더 많은 수의 영화가 시장규모 확대의 이익을 나눠 갖게 됐다. 그리고 그 덕택에 한국영화 투자수익률도 영화진흥위원회가 통계를 내기 시작한 2007년 -40.5%에서 2016년 +8.8%로 급격히 향상된 상황이다. 여기서 300개관 이상 개봉 또는 순제작비 30억 원 이상의 핵심상업영화군 투자수익률은 13.8%까지 뛴다.

이러니 스크린 독과점 배급을 안 하려야 안 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배급업자들도 바보가 아니다. 같은 시기 관객들이 여러 영화로 분산되면 당연히 지금과 같은 연쇄 독과점 배급을 그만 둔다. 아니, 그런 신호만 와도 바로 배급형태를 바꾼다. 상식적으로 지금처럼 도박성 강한 배급형태(같은 독과점 배급이어도 그 결과가 천양지차라는 건 모두가 안다)보단 그 편이 더 안정적 수익구조를 만들어 줄뿐더러, 틈만 나면 여론에 두들겨 맞고 공적개념으로부터 감시 및 견제당하는 피로에서도 벗어날 수 있게 된다. 그럼에도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그런 배급이 가능하리라 판단할 만한 데이터가 산출되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이 오히려 수익성 차원에서 가장 안전하고 최적화된 배급형태라 판단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건 시장 요구에 거스르는 배급형태가 아니라 시장 성향에 ‘적응한’ 배급형태라는 판단 때문이다.

다시 ‘군함도’로 돌아가 보자. '군함도'는 위 제기된 두 가지 이슈에 상당히 특이하게 대응한 케이스다. 대중 호응이 좋은 소재를 놓고 굳이 리스크가 있는 해석을 가했고, 그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 대중 반발은 심하지만 확실히 효과는 나오는 독과점 배급을 꾀했다. 그리고 그 대가가 바로 지금 양상이다. 리스크가 있는 해석 덕택에 뭇매를 맞고 그 뭇매가 독과점 배급에 대한 비판으로 옮아갔다. 대신, 대중 호응이 좋은 소재 덕택에 관심몰이에 성공했고 그 관심을 독과점 배급을 통해 초반 흥행성공으로 이어냈다. 얻고 잃은 것이 명확하다. 향후 뒷심 여부에 따라 이것도 하나의 케이스 스터디로서 기능할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정작 이번 사태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따로 있다. 언급한 이번 사태의 핵심 이슈 둘, 즉 한국영화시장의 극단적 관객 쏠림현상에 따른 스크린 독과점 배급과 콘텐츠 방향성에 대한 극단적 여론반발 문제는 사실상 궁극적 원인점이 같다는 사실이다.

대중문화산업에서 콘텐츠 쏠림현상은 사회문화적으로 개인주의 분위기가 희박한 환경, 즉 집단주의 성향이 강한 환경에서 발생한다. 이렇다 할 자기 취향이 존재하고 고수되는 게 아니라 그저 남들 보고 듣는 것을 따라가는 분위기가 역력한 환경에서 나온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콘텐츠에 대한 불만이 ‘군함도’ 경우처럼 별점 테러 및 각종 인터넷 게시판 배싱으로 옮아가는 분위기 역시 개인주의 분위기가 완연한 환경에선 좀처럼 보기 힘든 현상이다. 이 역시도 내가 동의하지 못하겠으니 남들도 그래야 하고, 내가 싫으니 남들도 소비하지 말아야 한다는 식 집단주의-전체주의 정서에 비롯됐다고 보는 게 옳다.

그런 점에서 이번 ‘군함도’ 사태를 둘러싸고 벌어진 갖가지 현상들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기보다 그 이면 또는 그 근본속성을 관찰하는 데서 더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다. 여전히 한국사회에 만연한, 그리고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는 집단주의 정서의 실체를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과정 말이다. 사실상 한국사회 대다수 갈등의 원인점도 바로 그곳일 것이다.

이문원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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