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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원의 쇼비즈워치] 소비자가 만드는 ‘대중문화’

입력 : 2020-03-16 10:08:08 수정 : 2020-03-16 10: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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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주간지 프라이데이 인터넷판 3월5일자로 흥미로운 칼럼이 실렸다. 영화평론가 에도키 준이 쓴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미국 아카데미상을 받는 날’이다. ‘기생충’ 중심 한국영화의 국제적 성과를 놓고, 일본영화산업은 이를 어떤 식으로 벤치마킹해야 할지 조명했다. 얼핏 한국 상황과는 별 관계없을 듯하지만, 의외로 대중문화시장 자체 본질은 물론 한국대중문화산업 향후에 대해서도 중요한 화두를 던져준다.

 

칼럼은 “아카데미상을 받기 위해선 미국영화업계에 대한 공헌도, 인지도, 업계 내 인기, 프로모션과 로비활동이 중요하다”며 “‘기생충’의 경우 CJ엔터테인먼트와 미국배급사 네온의 캠페인 전략이 주효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한편 일본은 어떤가. 봉준호 감독에 필적할만한 재능을 가진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있다”면서도 “문제는 고레에다 감독에게 봉준호 감독의 CJ엔터테인먼트처럼 비전을 지닌 실력 있는 프로듀서, 서포터가 존재하느냐다. 솔직히 일본의 영화사, TV방송국, 투자자에게서 그걸 기대하는 건 무리”라 지적했다.

 

칼럼은 결론적으로 “하지만 요즘 기세를 탄 넷플릭스라면 그 역할을 해줄지도 모른다”며 “이미 넷플릭스는 일본의 유명감독 소노 시온, 츠카모토 신야와 함께 작업했고, 이구치 노보루, 하마구치 류스케 등 유명한 감독들도 있다. 세계에서 잘 나가는 일본 애니메이션이 아카데미 애니메이션상은 물론 작품상도 동시에 노려볼 수 있다”고 내다봤다.

 

물론 아주 틀린 해석과 해법은 아니다. 한국영화 글로벌화에 CJ엔터테인먼트 등 역량과 비전을 갖춘 기업들 역할이 컸던 것도 사실이고, 일본에도 여전히 세계무대에서 주목받을 만한 영화작가들이 존재하는 것도 맞다. 그리고 악명 높은 ‘제작위원회’ 시스템 하 일본영화계에선 될성부른 영화작가들조차 세계로 뻗어나갈 수 없으니 차라리 넷플릭스 등 해외자본에 기대보자는 주문 역시, 좀 자조적이긴 하지만 현실성이 있다.

 

그러나 이 같은 사고는 지나치게 유물론적이란 인상이다. 시스템만 교체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단 식 사고 말이다. 사실 일본발(發) 대중문화 관련 논평들엔 유난히 이런 내용들이 많다. 한류 글로벌화 비결로 ‘국가지원’ 등 이해하기 힘든 요소를 거론하며 일본정부에 대책을 강구하는 논조 역시 10여 년째 바뀐 게 없다. 이제 ‘국가’가 ‘CJ엔터테인먼트’로 바뀐 것뿐이다. 본질에서 벗어나긴 마찬가지다.

 

지난달 9일 아카데미 시상식장에서 ‘기생충’ 작품상 수상 후 단상에 오른 이미경 CJ그룹 부회장은 소감으로 “우리영화에 대해 주저하지 않고 의견을 바로 말해준 한국관객들에게 감사한다”며 “그런 의견 덕분에 우리가 안주하지 않을 수 있었고, 감독과 창작자들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한국관객 여러분이 없었다면 이 자리에 있을 수 없었을 것”이라 말했다. 이를 두고 일본 커뮤니티 등에선 ‘일본은 자기 의견을 제대로 말하는 문화가 없어서 문제’란 식 반응이 많았지만, 사실 중요한 건 그런 부분이 아니다.

 

결국 한국관객 의견으로부터 도출되는 특유의 ‘성향’ ‘취향’에 적응하려다 보니 이 같은 결과를 얻게 됐단 얘기다. 빤한 소리 같지만, 사실 이 부분이 중요하다. 특히 지금처럼 기묘한 벤치마킹 해법을 내놓고 있는 일본 등 해외영화계라면 더더욱 주목해야 할 부분이다.

 

‘기생충’에 해외영화계가 주목한 부분은 크게 두 가지다. 먼저 코미디, 스릴러, 호러 등 다양한 장르들이 뒤섞여 특정 장르명 하나로 설명될 수 없는 독특한 구성, 또 분명 무겁고 진지한 주제를 다루고 있으면서도 엔터테인먼트로서 재미를 놓치지 않는 화법. 그런데 이 둘은 엄밀히 봉준호 감독만의 독보적 경향과 재주라 보긴 힘들다. 위 언급했듯, 철저히 한국관객들 ‘성향’ ‘취향’에 적응하려 애써온 한국영화 자체의 특징적 요소들에 가깝다.

 

먼저, 한국관객들은 ‘본래’ 한 영화 내 다양한 장르가 뒤섞여 다양한 감성을 맛볼 수 있는 형식을 유난히 즐겨왔다. 예컨대 1960년대 ‘남자식모’ 등 구봉서, 김희갑 코미디 시절부터 1990~2000년대 ‘엽기적인 그녀’ ‘색즉시공’ 등 로맨틱/섹스코미디, 그리고 ‘7번방의 선물’ 등이 1000만 관객을 돌파하는 지금에 이르기까지 한국코미디영화는 대부분 신파멜로 요소와 뒤섞여 진행되는 게 상례다. 더 있다. 아직 호러영화 관습이 제대로 정비되지 않았던 1990년대부터도 ‘조용한 가족’ 등 후기 호러, 즉 코미디 등 타 장르와 혼성교배 시킨 호러영화들이 한국선 시장 주류로 안착해왔다.

 

이런 전통을 되짚어가다 보면 1973년 하길종 감독의 ‘수절’까지도 간다. 호러와 신파멜로, 검투극 장르 등을 혼성교배 시킨 영화다. 그 정도 과격한 장르교배는 할리우드조차 제대로 시도하지 않던 때 등장한 사례다. 여기서 더 돌아가면, 1950~60년대 극장 보따리쇼 전통까지도 생각해볼 수 있다. 더 나아가면, 한국은 애초 뭔가 기존의 것들을 계속 ‘섞는’ 문화다.

 

이렇듯 혼성장르에 대한 한국관객의 유난한 애착을 바탕으로, 각 장르가 뚝뚝 분절돼 서로 다른 두 편의 영화를 본 듯한 어색한 결합에서 점차 진화, ‘기생충’처럼 장르혼합이 교묘하고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테크닉까지 구사할 수 있게 됐다. 그래도 근본적으론 같은 맥락이다. 한국관객 ‘성향’ ‘취향’에 적응하다 나온 전통이며, 그 진화과정이라 볼 수 있다.

 

그 다음, 뭔가 ‘할 얘기’가 있는 엔터테인먼트, 이른바 ‘작가주의적 엔터테인먼트’ 영화에 대한 부분. 이 역시도 한국영화의 오랜 경향이라 볼 수 있다. 적어도 ‘한국영화 르네상스’라 불리는 1990년대 중반부턴 뚜렷하게 드러나 온 경향성, 지난 사반세기 한국영화 흐름의 중심이라 할 만하다. 나아가, 한국대중문화 자체의 전반적 경향성이라 볼 여지도 있다.

 

이런 경향성이 해외에서 특이하게 보이는 이유가 있다. 해외 대중문화강국들에선 이른바 ‘고급예술’와 ‘대중예술’ 시장이 꽤나 과격하게 분리돼있어서다. 영화도 아트하우스 영화와 멀티플렉스 영화 구분이 뚜렷하다. 특히 미국보단 유럽과 일본 등지에서 이런 경향이 짙다. 당연히, 그쪽 대중은 그렇게 콘텐츠를 나눠 소비하려는 성향이 짙어서라 볼 수밖에 없다.

 

한국은 상황이 다르다. 흔히 한국선 대중문화 전 분야에 걸쳐 ‘인디’가 활성화되지 못해 문제란 비판이 나오곤 한다. 맞는 얘기다. 그러나 상황은 거기서 끝나는 게 아니다. 한국선 메인스트림 콘텐츠가 ‘인디’ 특유의 비주류 경향들을 ‘흡수’하는 형태로 구도가 잡혀있다. ‘작가주의적 엔터테인먼트’는 그렇게 탄생됐다. 메탈, 앰비언트 등 언더그라운드 장르들을 흡수 중인 아이돌상품도 또 다른 예다. 반대로, 메인스트림에서 그렇게 온통 ‘흡수’하고 있으니 정작 ‘인디’는 차별성과 독보성을 확보하지 못해 활성화되지 못하는 구조라 볼 수도 있다.

 

이 역시도, 대중이 ‘그런 걸’ 원해서다. 별 생각 없이 즐길 수 있는 가벼운 엔터테인먼트에 만족하질 못하며 허탈함을 느낀다. ‘사회’의 현실적 고민이 반영돼있어야 하고, 진중한 ‘인간탐구’가 곁들여져야 하며, 고집스런 ‘메시지’가 존재해야 한다. 영화뿐 아니라 대중음악도 마찬가지다. 1세대 아이돌이라는 H.O.T.부터가 사회비판적 노래들로 10대들에 어필해 성공한 경우다. 그를 담는 형식 역시 다소간 실험적이고 도발적인 형태를 즐긴다. 그렇게 ‘메인스트림’만 존재하고 ‘인디’는 없는 문화, ‘메인스트림이 인디를 흡수하는’ 문화가 탄생된다.

 

다시 에도키 준 칼럼으로 돌아가자면, 바로 이런 점들 탓에 일본대중문화는 ‘한국 같은 성공’을 거두기 힘든 것이지 다른 게 아니다. 단순히 시스템만 문제일 뿐 넷플릭스 동원하면 만사 해결될 일이 아니다. 넷플릭스건 어디건 상업적 호응 떨어지는 기획에 그를 상회하는 돈을 댈 순 없다. 일본서 돈 벌 수 있는 메인스트림 영화들이 계속 비전 없는 만화 원작 영화 중심으로만 흐르면 될성부른 영화작가들도 계속 인디에만 머물게 된다. 그럼 자연스럽게 프로덕션 밸류도 떨어져 소위 ‘그들만의 리그’에서나 회자되는 영화들로 남게 된다.

 

결국 일본 ‘관객’이 바뀌어야 일본영화도 바뀌고, 궁극적으론 일본대중 성향 자체가 바뀌어야 일본대중문화도 바뀐단 얘기다. 문화는 톱다운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바텀업을 통해서만 이노베이션이 가능하단 점을 간과해선 안 된다. 문화시장 이노베이션은 위대한 선각자가 등장해 이뤄지는 게 아니라 그 소비자들이 얼마나 이노베이션을 갈망하느냐에 달려있다.

[스포츠월드 김용학 기자]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국제장편영화상 4개부문을 수상한 영화 '기생충'의 송강호,봉준호 감독 곽신애 대표(왼쪽부터)가 19일 오전 서울 중구 소공동 웨스틴조선호텔 서울에서 열린 기자회견에 참석하고 있다. 

물론 한국이라고 위협요소가 아예 없는 건 아니다. 봉준호 감독도 지난달 아카데미상 수상기념 공식 기자회견에서 “2000년대 초에는 독립영화와 메인스트림 간의 상호침투, 좋은 의미에서 다이내믹한 충돌이 있었는데 지금은 젊은 감독들의 이상한 작품을 받아들이거나 모험적인 시도를 하는 게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고 우려한 바 있다.

 

물론 ‘아직까진’ 큰 변화를 감지하기 어렵다. 어찌됐건 해외라면 아트하우스에서나 틀었을 법한 ‘곡성’ ‘아가씨’ ‘기생충’ 같은 영화들이 여전히 멀티플렉스에서 400만 이상 대박 흥행을 거두는 분위기다. 그러나 봉준호 감독 변처럼 실제 업계 분위기는 조금씩 바뀌어가고 있을 지도 모른다. 여기서 중요한 건, 그 변화 원인이 업계에서 지나치게 리스크를 꺼리는 무사안일 복지부동 분위기가 만연한 탓인지, 아니면 실제 대중 성향에 변화가 생겨 그에 적응하려다 보니 일어난 일인지 구분이 필요하단 점이다.

 

전자라면 대중요구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 탓에 시장에서 심판받고 스스로 교정되는 수순이겠지만, 후자라면 해법이 다르다. 오히려 일단은 그에 업계가 적응하려는 방향이 옳다. ‘이래선 안 된다’는 식 계몽적 사고, 그에 기반한 제도적 압박으로 상황을 해소하려해선 곤란하다. 문화란 결국 그 소비자들이 만들어내는 현상이지 다른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원론 하에서, 시장 분위기에 걸 맞는 또 다른 대책을 생각해봐야 한다. 다소 허탈하지만 그 외에 다른 비책 따윈 없다. 지금 일본대중문화계 고민이 아예 남 일처럼 여겨지지만은 않는 이유다.

 

/이문원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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