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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7-12-05 18:55:08, 수정 2017-12-05 18:55:08

[차길진과 세상만사] 161. 영원한 비밀이란 없다

  • 역사는 힘 있는 자의 기록이라고 했다. 강자는 약자의 기록을 없애고 자신의 업적은 더욱 돋보이게 하며 추한 비밀은 감추고 은폐할 수가 있다. 또한 역사적 사실이 혼재할 때 힘 있는 자는 유리하게 사실관계를 조작할 수도 있다. 중국의 동북공정이나 위안부나 강제징용에 희생된 한인들의 기록을 왜곡한 일본의 예가 그러한 것이다. 이런 짓을 벌이는 주변 국가를 탓할 수만도 없다. 우리 사회도 그런 짓을 하고 있는 자가 있으니 말이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회고록이 또다시 세간에 화제다. 내용 중 문제가 된 33곳만 삭제한 채 책을 재출간하였다 한다. 여전히 많은 부분이 사실과 다른 내용을 기술하고 있어 국민들의 분노를 사고 있다. 5월 단체는 추가적으로 법적 대응에 나서겠다고 했다. 그동안 전두환 전 대통령은 회고록에서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폭동’으로 규정하고, 북한군이 개입했으며 헬기사격과 비무장 민간인 살상은 없었다고 주장했다.

    사실이 아닌 줄 알면서도 고집스럽게 사실과 다르게 회고록을 쓴 것은 아마도 오점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지 않아서 일 것이다. 그렇게라도 해서 마음의 위안을 삼고자 했을 것이다. 하지만 역사적 사실은 한동안 은폐하거나 왜곡할 수는 있지만 영원히 그렇게 할 수는 없다.

    지난 1989년 내가 르포기자로 활동하고 있을 무렵, 통역사와 함께 제임스 H. 하우스먼을 만나기 위해 미국 텍사스 오스틴을 찾았다. 하우스먼은 해방 후 미군정 대위로 한국에 근무하면서 국군 창설에 깊이 관여했으며, UN군 사령관 특별고문, 미8군사령관 특별보좌관 등 약 40년 동안 한국의 군 정보 관련 요직을 두루 거친 거물이었다. 그에게서 격동기 한국군에 관한 숨은 이야기를 듣고자 찾아간 것이다.

    그의 집을 방문했을 때 하우스먼은 우리를 반겼다. 하지만 인터뷰를 진행하는 동안 그는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마치 수천 번 연습이라도 한 듯 사실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고 비껴가는 대답만 했다. 정보계의 거물답게 한미 양국을 위해 비밀을 지키기로 다짐한 듯했다.

    할 수 없이 나는 하우스먼을 자극하기로 했다. 통역사가 있었지만 하우스먼을 인격적으로 모욕하는 말은 통역하지 않을 것 같아 서툰 영어지만 직접 대화를 시도했다. “40년 가까이 한국에 계시면서 한국말을 하나도 할 줄 모른다고 하시니, 정말 유감입니다. 당신 같이 한국 문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한국을 배후조종했다는 사실이야말로 비극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순간 하우스먼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더니 유창한 한국말로 자신의 입장을 변호했다. “그런 말 하지 마시오. 그레이하운드 버스가 승객을 가득 태우고 고속도로를 달릴 때, 앞의 차가 섰다고 급브레이크를 밟는다면 어떻게 되겠소? 많은 승객을 태운 버스라면 앞의 차를 박고서라도 전진해야 승객을 보호할 수 있소. 당시 한국은 그런 상황이었단 말이오.”

    변명하느라 순간적으로 한국말을 해버린 하우스먼은 그제야 작전에 말려들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크게 웃었다. 그는 정보를 캐기 위해 일부러 무례하게 굴었던 나를 오히려 ‘솔직한 사람’이라며 좋아했고 뉴저지 에디슨 시티 출신의 재즈가수였던 부인은 ‘Will you release me?(나를 놓아주실래요?)’란 노래를 멋진 피아노 반주와 함께 들려주기까지 했다. 이것이 인터뷰에 대한 하우스먼의 마음인 것이다.

    그때 그와 나눈 많은 이야기는 특종으로 신문에 연재됐다. 그도 차마 공개할 수 없는 것들이 있었기에 원하는 얘기는 모두 듣지 못했지만 그래도 많은 얘기를 기록으로 남길 수 있었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후 영가로 나를 찾은 하우스먼은 내게 작은 비밀만을 밝혔으면서도 “이젠 죽었으니 내가 가진 비밀로부터 자유롭고 싶소”라고 했다.

    우리는 역사적으로 여러 차례 격동기를 겪었다. 딛고 일어섰지만 그에 따른 희생도 있었기에 밝혀야 할 진실들이 많다. 아프고 부끄럽다하여 역사를 왜곡하여서는 안 된다. 그런다고 감춰질 역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hooam.com/ whoiamtv.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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