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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길진과 세상만사] 144. 흉상을 세우는 이유

입력 : 2017-10-01 20:10:56 수정 : 2017-10-10 19:3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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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독일총리가 지난 9월 11일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나눔의 집’을 찾아 위안부 할머니들을 만났다. 슈뢰더 전 총리는 그곳에 있는 추모비에 꽃을 바치고 묵념을 했으며 할머니들 흉상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흉상은 돌아가신 5명의 위안부 할머니다. 5개의 흉상을 입구에 세운 것은 지금까지도 인정하지 않는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고 그 아픔을 잊지 않기 위함이다.

기사를 보면서 흉상을 언제부터 만들었는지 궁금증이 일었다. 흉상은 시대적 상황과 인물에 대한 정보가 담겨져 있다. 흉상은 말 그대로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상반신의 모습이다. 흉상을 처음 만든 사람은 이집트인이다. 이집트인들은 죽은 사람의 흉상을 만들었지만, 고대 그리스 인들은 인체의 일부를 절단해서 나타낸다 하여 흉상은 거의 제작하지 않았다. 그 후 헬레니즘 시대에 와서야 흉상을 다시 제작하기 시작했다.

흉상은 로마 시대에 최고의 전성기를 맞았다. 공화정 초기부터 정교하고 다양한 흉상을 많이 제작했다. 중세에는 초상 미술을 금기시 해 흉상 제작이 드물었다가 15세기 피렌체의 미술가들을 중심으로 흉상제작이 활발해졌다. 지금도 이탈리아 곳곳에서 예술적인 흉상들을 만날 수가 있다.

우리나라에 세워진 흉상은 대개 호국인물이나 전쟁영웅들이다. 즉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린 인물들을 흉상으로 제작했다는 얘기다. 나라를 위해 희생하신 분들의 숭고한 뜻을 기리는 흉상. 간혹 국민들의 생각과는 동떨어진 흉상을 제작해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1997년 이승만 전 대통령의 흉상을 국회 내에 건립하려다 역사학계의 강한 반발에 부딪혔다. 의회 민주주의의 나쁜 전통을 만든 이승만 전 대통령의 흉상을 신성한 국회에 세우는 것은 온당치 않다고 강하게 반발했다. 그리고 또 한 사람, 박정희 전 대통령의 흉상이 수도방위사령부가 있던 문래근린공원에 있는데, 이곳은 5.16 군사쿠데타를 모의한 장소로서 얼마 전 흉상이 훼손당하는 수모를 당했다.

지난 9월 29일 정읍에 있는 내장산 워터파크에는 400여 명이 모였다. 이날 호국영웅인 고 차일혁 경무관을 추모하는 흉상 제막식이 있었다. 전북서부보훈지청과 정읍시 주관으로 마련된 제막식 행사에는 정관계의 많은 인사들과 지역유지들이 대거 참석했다. 나는 유족 대표로서 선친의 흉상 제막식에 참석해주신 많은 분들에게 감사함을 표했다. 특히 화엄사 스님은 전란 중에 지리산에 있는 천년고찰을 구해낸 차일혁 경무관 흉상 앞에서 고마움을 전했다.

그날 행사장에는 한동안 뵙지 못한 옛 18동지회 전투경찰대원들이 백발이 돼 참석하셨는데 그분들을 다시 뵈니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두 손을 잡고 감사의 인사를 드렸다.

선친의 흉상이 서있는 이곳 정읍에는 지금은 섬진강수력발전소로 이름이 바뀌었지만 6.25 전쟁 중 남한 유일의 전력공급을 담당했던 칠보발전소가 있었다. 1951년 1월 빨치산 2500명이 칠보발전소를 포위하고 있어 남한 일대의 전력이 적의 수중에 들어갈 위급한 상황에서 군은 차일혁 경무관(당시 경감)에게 탈환 임무를 줬다. 75명의 대원과 열악한 무기를 들고 발전소를 지켜내어 후방 전력공급이 원활할 수 있었다. 발전소 관계자들이 자리를 함께했다면 선친이 하늘에서 무척이나 좋아하셨을 텐데.

6.25 전쟁 중 전북지방의 평화와 치안을 담당했던 선친은 이제 흉상으로 이곳을 지키게 됐다. 남다른 감회가 들었다. 총성은 멎은 지 이미 오래지만 그 여운은 아직도 남아있다. 이탈리아의 옛 로마 흉상과는 달리 우리의 흉상에서는 그 시대의 아픔들을 느낄 수 있다. 그날 내장산 워터파크에 참석한 학생들은 선친의 흉상에서 무엇을 느꼈을까. 남과 북의 진정한 아픔을 학생들도 느꼈을까. 사람은 시간이 지나면 어렵고 힘든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반복될 수 있음을 명심해야한다.

(hooam.com/ whoiamtv.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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