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월드

검색

[차길진과 세상만사] 104. 겉으로는 알 수 없는 참사랑

입력 : 2017-05-15 04:40:00 수정 : 2017-05-14 18:17:00

인쇄 글씨 크기 선택 가장 작은 크기 글자 한 단계 작은 크기 글자 기본 크기 글자 한 단계 큰 크기 글자 가장 큰 크기 글자

드라마 속 허구의 남녀 사랑은 지고지순하다. 특히 재미를 위해 역사적 인물을 등장시켜 러브라인을 만드는 것은 시청자의 흥미를 유발시킨다. 최근 드라마 ‘신사임당’이 그런 사례가 아닐까 한다. 사실이 아닌 줄 알면서도 줄거리에 빠져들게 된다. 신사임당이 현모양처의 표본이었다면 조선시대에 팜므파탈의 표본이 있다. ‘송도삼절(松都三絶)’ 중 하나인 황진이가 그렇다. 황진이는 당시 개성의 고승과 고매한 학자를 유혹했는데, 고승은 그녀의 유혹에 빠져 파계를 했지만 학자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으므로 후대인이 서경덕, 황진이와 박연폭포의 절경을 한데 묶어 송도삼절이라 했다.

이 송도삼절을 살펴보면 남존여비, 숭유억불, 열녀추앙 등 당시 사회통치 이념코드와 한 치의 어긋남이 없다. 하지만 당사자들의 실제 행적들은 사실과는 큰 차이가 있다. 대부분 구전이 많아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무엇이 허구인지 알 수 없다. 황진이가 사모한 남자는 서경덕으로 알고 있는데 과연 그럴까. 그 속을 들어가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듯이 당시 시대적 배경을 역추적하면 의외의 반전이 있을지도 모른다.

당시 권세가들의 족보가 잘 보존돼 있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황진이는 여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정확한 출생과 사망 연도 기록이 없다. 일찍이 유불선(儒佛仙)의 경에 능통했음에도 기녀의 딸이었기에 재능이 있는 기녀로만 취급됐다.

황진이가 15세 되던 때 이웃마을 선비가 그녀를 흠모하다 상사병에 빠져 죽고 만다. 충격에 빠진 황진이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방황하며 목숨 건 구도의 길을 떠난다. 대물림 기생이 돼서 허위에 찬 양반들과 어지러운 세상을 조롱하며 현자를 찾아 나섰다.

그녀는 당대의 학자와 선승을 찾아갔다. 학자는 황진이를 가까운 거처에 머물게 한다. 내색하지 못하고 속내만 태우던 학자는 마침내 남의 눈을 피해 늦가을 야심한 시각에 자신의 마음을 은밀히 타진했다.

‘마음이 어린 후이니 하는 일이 다 어리다/만중운산(萬重雲山)에 어느 님 오리마는/지는 잎 부는 바람에 행여 그인가 하노라’ 우주의 이치를 읊조던 고매한 인품은 어디가고 여인 앞에서 체통 때문에 절절매자 황진이는 코웃음 치며 “뭇 사내들처럼 진심을 진심이라 말하지도 못하는 대감의 절개가 가여울 뿐”이라는 말을 남기고 천마산으로 생불(生佛)이라고 불리는 지족선사를 찾는다. 온갖 방법으로 선사를 유혹, 자신을 거두어주기를 간청한다.

그러나 지족선사는 그녀를 물리친다. 황진이는 무릎 꿇고 은장도를 빼들고는 선사를 향해 덧없는 세상을 떠나겠다고 한다. 선사는 황진이와 하룻밤을 지내고 그녀의 목숨을 살린다. 선사는 비록 목숨과도 같은 계율이라 할지라도 조건 없이 기꺼이 주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란 사실을 이때 절실히 깨닫는다. 깨달음은 한 순간인 것이다.

황진이와 지족선사와의 이야기는 허균이 지은 ‘성웅지소록’에 “30년 면벽의 지족선사도 나에게 무너졌다”는 황진이의 회고가 전부다. 야사에나 나오는 짧은 이야기로 진위여부가 불분명하다. 내용이야 어찌됐든 지족선사는 황진이를 통해 남녀지정의 허상을 깨우치고 사랑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 눈이 생겼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세간에서 파계한 그를 비웃어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웃어넘기며 무욕의 경지를 보여준 것이 어찌 보면 지족선사가 서경덕보다 더 큰 인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황진이가 서경덕을 존경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진정 사랑한 사람은 서경덕이 아닐지도 모른다. 유교사상이 지배적인 사회에서 서경덕의 행동은 당연한 것이었으리라. 그러니 오히려 파계를 하면서 자기를 받아준 지족선사가 더 고매할 수도 있다. 황진이에게 육체적 사랑을 초월하는 그런 사랑을 보여준 것이 아닌가 한다.

피카소가 젊은 여인을 사랑하면 그 사랑은 위대하고, 복덕방 김 노인이 다방 아가씨를 사랑하면 추태라 할 수 없는 것처럼 사랑의 본질은 다르지 않다. 어찌 사랑의 아름다움과 추함을 겉으로 구분할 수 있겠는가. 보이는 것만 추구하지 말고 때로는 보이지 않는 것에도 마음을 두면 세상은 좀 달리 보이지 않겠는가.


◇차길진

[약력] (사)한겨레아리랑연합회 이사장, (사)후암미래연구소 대표, 차일혁 기념사업회 대표,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운영자문위원, 현 경찰박물관 운영위원, 화관문화훈장 수훈, 넥센 히어로즈 구단주 대행

[저서] 어느날 당신에게 영혼이 보이기 시작한다면, 또 하나의 전쟁, 효자동1번지, 영혼산책 등 다수

[ⓒ 세계비즈앤스포츠월드 & sportsworldi.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많이 본 뉴스

연예 스포츠 라이프 포토

연예
스포츠
라이프
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