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다음

입력 2017-02-15 04:40:00, 수정 2017-02-15 04:40:00

[차길진과 세상만사] 82. 조선왕조실록을 가슴으로 품은 내장산

  •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연구원이었던 N 박사가 선친 차일혁 경무관에 대한 칼럼을 신문에 연재 중이다. 그동안 방송과 언론을 통해 선친에 대한 업적이 세상에 많이 알려져 있지만 군사편찬 전문가에 의해 다시 한 번 평가를 받으니 느낌이 남달랐다. 매주 연재되는 칼럼에 필요한 사진과 신문 및 관련 자료를 정리하던 중 정읍에 있는 내장산에 관한 자료가 여러 장 눈에 들어왔다.

    내장산은 원래 영은산(靈隱山)이라고 불리었으나 산속에 숨겨진 것이 무궁무진하다하여 이름이 내장산(內藏山)이 되었다. 1950년 6.25 전쟁 중의 내장산은 국군과 인천상륙작전 이후 북으로 도망가지 못해 산으로 들어간 북한군들로 인해 낮과 밤을 바꿔가며 쫓고 쫓기는 치열했던 전쟁터였다. 빨치산들이 내장산 깊숙이 동굴로 숨으면 군과 경찰은 그들을 찾아내기가 쉽지 않았다.

    1952년 4월 선친이 대대장으로 있는 제18전투경찰대대가 내장산의 한 동굴 속에서 독경을 하던 여승 10여 명을 구했다. 내장산에는 동굴이 많다. 역사적으로 보면 내장산 동굴들은 동물이나 사람만을 위한 공간은 아니었다. 525년 전에는 전란을 피해 산 깊숙히 들어온 문화재를 위해 내장산은 기꺼이 자신의 몸을 내어주었다. 천혜의 동굴에 고이고이 숨겨주어 후대에 전할 수 있도록 했다.

    내장산이 왜군으로부터 숨겨주었던 것은 바로 조선왕조실록이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왜군이 한 달도 안 되어 한양을 점령하는 등 전국이 극심한 위기에 빠졌다. 4대 사고(史庫) 중 유일하게 남은 전주사고(全州史庫)를 지키던 관리들은 실록(實錄)을 어떻게 할 것인지 논의하였다. 사고의 마루 밑 땅속에 숨기자는 얘기가 나왔으나 경상도 금산현에서 잡힌 왜군에게서 성주사고(史庫)에서 약탈한 실록 두 장이 나왔다는 말에 다른 곳으로 옮기기로 하였다.

    유사시 배로 피할 수 있는 부안 변산으로 옮기자는 의견도 있었으나 전주 인근의 내장산 깊은 산속으로 옮기는 것으로 결정하였다. 전주 경기전(慶基殿) 참봉(參奉) 오희길은 태인현에 사는 손홍록(孫弘祿)과 안의(安義)와 함께 태조 어진(御眞)을 용굴암(龍窟庵)으로, 은봉암(隱峯庵)으로는 실록을 피난시켰다. 다시 좀 더 험준한 비래암(飛來庵)으로 옮긴 후 100여 명의 사람들과 함께 주야로 실록을 지켰다. 그때 안의의 나이가 56세, 손홍록의 나이가 64세였다.

    이때의 상황은 ‘임계기사’의 ‘수직상체일기’에 자세히 나와 있다. “실록은 6월 22일 은봉암(隱峯庵)에, 태조 어진은 7월 1일 용굴암에 각각 피난시켰다. 6월 23일 참봉 오희길과 유인이 안의와 손홍록과 함께 수직했고, 24일 손홍록이 귀가하고 7월 4일까지 안의가 혼자 수직했다. 7월 14일부터는 실록을 비래암으로 옮기고 19일까지 같이 수직했다. 다음 해 4월 왜군이 서울에서 철수하자 7월 어진과 실록을 충청도 아산으로 이안(移安)하라는 왕명이 내려졌다.”

    그렇게 전란 속에서도 전주사고 실록은 370일 동안이나 내장산 동굴에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태조 어진을 지키는 바람에 실록 수직(守直)은 오로지 안의와 손홍록 차지가 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안의가 혼자 수직한 일수가 174일, 손홍록이 수직한 일수는 143일, 두 사람이 함께 수직한 일수는 53일이었다. 적지 않은 나이의 두 유생 덕분으로 실록은 보존되었고 후에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까지 지정될 수 있었다. 현재 내장산 용굴암에는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했던 장소임을 알리는 팻말이 있지만 비래암은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고 추정되는 터만 남아있을 뿐이다.

    내장산은 남다른 정기(精氣)를 갖고 있다. 전주사고를 잘 보존하여 500여 년의 조선 역사가 오늘날까지 전해지게 할 수 있었던 것도, 동학농민혁명과 3.1운동 등 항일투사들이 많이 배출되었던 것도 결코 우연은 아니며 모두가 내장산의 정기를 받은 거라 생각한다. 그 옛날 내장산이 큰 가슴으로 조선왕조실록을 지켜주었고, 6.25 전쟁 중에는 남과 북의 이데올로기를 하나로 품어버렸듯이 내장산에 오르는 등산객들도 산의 정기를 마음껏 가슴으로 품었으면 한다. 


    ◇차길진

    [약력] (사)한겨레아리랑연합회 이사장, (사)후암미래연구소 대표, 차일혁 기념사업회 대표,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운영자문위원, 현 경찰박물관 운영위원, 화관문화훈장 수훈, 넥센 히어로즈 구단주 대행

    [저서] 어느날 당신에게 영혼이 보이기 시작한다면, 또 하나의 전쟁, 효자동1번지, 영혼산책 등 다수

HOT레드

  • 오늘의 파워링크
  • Today 정보
  • 이시각 관심뉴스
  • Today 링크